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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l 31.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60)

제160편 : 주경림 시인의 '폐업 정리'

@. 오늘은 주경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폐업 정리
                        주경림

  버스 정류장 앞, 옷가게 유리창에
  “폐업 정리”
  크게 써 붙였다
  버스 기다리는 시간에
  최신 유행하는 옷맵시를 바라보며
  눈요기하기가 즐거웠는데
  옷가지가 다 팔려 휑한데도 문 닫지 않았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 보았더니
  “폐업 정리” 밑에 잔글씨가 보인다
  “마네킹도 팝니다”
  들여다보는 내 얼굴이 겹쳐 비쳤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슬퍼졌다
  마치 내 영혼을 헐값에 내놓은 것 같아.
  - [비비추의 사랑 편지](2023년)

  #. 주경림 시인(1956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2년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 현재 성북구에서 목욕탕을 운영하며 열심히 시를 씀.




  <함께 나누기>

  한때 백화점은 불황이란 낱말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폐업이란 말이 뉴스에 가끔 뜨더니 이젠 ‘자주’로 바뀌었습니다. 그 장사 잘 된다는 백화점도 문 닫고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같은 대형마트도 심심찮게 문 닫습니다.
  그러면 동네 슈퍼마켓 같은 작은 유통업체나 식당 치킨집 카페 옷가게 등의 소규모 자영업은 더 말할 필요 없겠지요. 그래서 요즘 폐업하는 가게 물품을 헐값으로 몽땅 사 되팔거나, 치워주는 업자만 살판났다 하지요. 폐업이 하도 많아서.

  시로 들어갑니다.

  “버스 정류장 앞, 옷가게 유리창에 / <폐업 정리> / 크게 써 붙였다”

  우리야 산골 사는지라 이런 가게 볼 수 없지만 면사무소 읍사무소까지만 나가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붙여놓은 글귀만 봐도 아픕니다. ‘폐업합니다.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란 점잖은 글부터 ‘이제 라면만 먹고살 수 있다’란 풍자의 글귀까지.
  (사진은 우리가 농담 삼아 쓰는 '밥 못 먹으면 라면 먹고살면 돼.'란 말을 응용한 표현인 듯)

  “버스 기다리는 시간에 / 최신 유행하는 옷맵시를 바라보며 / 눈요기하기가 즐거웠는데”

  부산 살 때는 학교 퇴근길에 일부러 서면까지 걸어와 영광도서에 들렀습니다. 거기서 책 사지 않고 제목만 읽어도 배가 불렀지요. 아마도 패션에 신경 쓰는 여성은 최신 유행옷에 관심이 많아 근처를 오가며 옷가게에 눈이 자주 갔겠지요.

  “<폐업 정리> 밑에 잔글씨가 보인다 / <마네킹도 팝니다>”

  폐업 정리란 글씨가 붙고 며칠 안 가 옷가지가 다 팔려 휑한데도 문 닫지 않아 화자는 호기심에 가게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갑자기 먹먹해집니다. 옷을 팔고 끝인 줄 알았는데 아뿔싸, 마네킹이 남았습니다. 아 마네킹!

  “왠지 모르게 갑자기 슬퍼졌다 / 마치 내 영혼을 헐값에 내놓은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글 읽는 화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들여다보는 내 얼굴이 겹쳐 비쳐’ 더더욱. ‘옷은 겉치장이요 마네킹은 알맹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해될 것 같습니다. 마네킹이 사람의 영혼을 대체하였으니까요.
  마네킹의 의미를 한 번 더 파헤쳐 봅니다. 마네킹은 자포자기한 주인의 심정과는 관계없이 잘될 때나 못 될 때나 똑같습니다. 무심(無心)과 무정(無情)의 뜻 대신 활황일 때도 폐업할 때도 한결같은 모습이니 평정심을 잃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는 뜻으로도 읽어봅니다.




  시인의 시 한 편 더 붙입니다.


    - 독해법(讀海法) -

  파도가 철썩철썩 낱장을 넘겨주어
  바다책 한 권을 다 읽었는데
  밤새 물병자리에서 물이 쏟아져
  아침 바다는 붉은 금빛 양장본 새책.

  *. 제목이 ‘독해법(讀解法 : 글을 해석하는 방법)’ 아닌 ‘독해법(讀海法)’입니다. 바다의 마음을 읽는다는 뜻의.
  *. 사진은 모두 [한국일보] (2015.08.05)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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