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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l 30.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59)

제159편 : 박철 시인의 '개화산에서'

@. 오늘은 박철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개화산에서
                            박철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나가기도 하니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
  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
  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
  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다
  - [작은 산](2013년)

  #. 박철 시인(1960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87년 [창비]를 통하여 시인으로, 1997년 [현대문학]에선 소설가로 등단. 일상에서 얻은 경험을 녹여 쓴 시가 많아, '생활밀착형' 시를 쓴다는 평을 들음




  <함께 나누기>

  한 고등학교 동기를 30여 년만에 만나 얘기 나누다 전보다 키가 작아진 듯하여 물었습니다. 얼굴이 부쩍 상했느니 살이 쪘느니 빠졌느니 하는 말은 다 하잖아요. 그래서 지나가듯이 인사치레로 그런 말 건넸는데...
  “아마도 네가 예전 봤을 때보다 10cm쯤 짧아졌을 거야.”
  깜짝 놀랐습니다. 다리가 1, 2cm 짧아진 게 아니라 그만큼 짧아졌다면 어디 무릎이나 다리 수술받았다는 말로 받아들여 놀란 얼굴을 하니, 그가 웃으며,
  “이제 나이 들다 보니 발바닥도 닳고 중력의 힘으로 어깨 척추가 내려앉아 해마다 짧아지더니 이렇게 된 거야.”

  시로 들어갑니다.

  개화산은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 있는 132m 높이의 야산입니다. 아니 산이라 이름 붙이기 참 거시기합니다. 1,000m는 안 돼도 7~800m쯤은 돼야 산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132m라니. 아마도 처음 산이름 붙일 때도 대충 지역 이름 따 붙인 듯.
  8,000m 넘는 히말라야 험산을 다녀온 사람이 개화산을 보면 산이라 하지 않을 겁니다. 60배나 훨씬 더 높으니까요. 그런데 화자는 한 마디로 그의 말을 뭉개버립니다.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요, 높은 산이다' 하면서.

  물론 과학적(지질학적) 진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시인에겐 ‘시적 진실’이 따로 있으니까요. 사람이나 짐승이 늙어가면 키가 작아지듯이 산도 나이 들면 키가 작아진다고. 감성 면에선 전혀 엉뚱하지 않은 어딘가 그럴 듯한 논리입니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낮은 산이 오래된 산이요,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이 이치를 알려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한 큰스님의 경지까지 이르러야 할까요.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어깨를 굽히고 앉았고’ ‘손자 손녀가 웃으며 매달리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비행 하듯 떠오를 듯 달려나가고’
  누구나 자유롭게 찾아오게끔 낮고 조용한 산은 자기를 낮추며 살기에 사람이 찾는 산이 됩니다.  그런 산엔 언덕의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청설모나 족제비를 불러들여 종갓집을 이룹니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산은 정말 이래야 산입니다. 덩치만 키워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발길을 막는 그런 산은 산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오솔길이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는 그런 정겨운 산, 그런 산이기에 낮지만 높고, 조용하지만 우렁찹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진짜 높은 산은 ‘해발고도가 높은 산’이 아니라 ‘높은 덕을 지닌 산'임을.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아’ 말없이 품어주는 개화산 같은 산이 참으로 높은 산입니다.



  *. 첫째는 [서울&](2018.09.13)에 실린 개화산 노을이며, 둘째는 월간 [산](2018년 9월호)에 실린 우리나라 두 번째로 낮은 부안군 계화면 조봉산(11.3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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