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l 29.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58)

제158편 : 심재휘 시인의 '비와 나의 이야기'

@. 오늘은 심재휘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비와 나의 이야기
                                 심재휘

  오랫동안 비를 좋아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비보다는 비가 오는 풍경을 좋아한다고 해야 맞아요
  후드득 쏟아지는 비의 풍경 속에는
  경청할 만한 빗소리가 있지요 그리고
  비를 피해 서둘러 뛰어가는 사람들의 젖은 어깨
  흙탕물을 간신히 피해 가는 짐차들의
  덜컹거리는 불빛과
  거리 아이들의 비가 새는 저녁

  사실은
  비에 젖지 않고도
  비가 오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가
  더 마음에 드는 거지요

  고백하자면 나는
  창밖의 비보다는
  창안의 나를 더 좋아한다고 말해야 옳아요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2018년)

  #. 심재휘 시인(1963년생) :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1997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현재 대진대 문예콘텐츠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나는 김광석을 좋아해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김광석이란 가수를 좋아하기보다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구분을 잘 안 합니다. 아니 안 하려 합니다. 사람과 그의 작품(노래든 시든 연기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짙으니까요.
  이런 예는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나는 노을이 참 좋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진짜 노을이 좋아서 그렇다는 말도 되지만 노을이 주는 ‘황혼’, ‘고독’, ‘저물다’ 같은 이미지가 좋아 노을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에서 화자는 오랫동안 비를 좋아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비를 좋아한 게 아니라 비 오는 풍경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비를 좋아하면 가뭄이 들어 작물이 말라죽어가는 걸 바라보다 내리는 단비를 마주한 농부의 눈길과 다름없어 그리 표현했을까요.
  비 오는 풍경을 좋아한다고 하면 후드득 쏟아지는 비의 풍경 속에 들려오는 빗소리와, 비를 피해 서둘러 뛰어가는 사람들의 젖은 어깨와, 흙탕물을 간신히 피해 가는 짐차의 덜컹거리는 불빛과, 거리에 아이들이 빗속에 뛰노는 모습까지 좋아하게 됩니다.

  거기서 화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합니다. 비 내리는 자연현상이 주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도 좋지만, 비에 젖지 않고도 비가 오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가 더 마음에 든다고. 그러니까 이미지보다 자리가 더 좋다?
  그러니까 처음 비를 좋아한다는 전제가 끝에 가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킵니다. ‘① 비를 좋아한다 → ② 비 내리는 풍경을 더 좋아한다 → ③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를 더 좋아한다 → ④ 창밖의 비보다 창안의 나를 더 좋아한다’

  처음 전제인 ‘비를 좋아한다’에서 ‘나를 좋아한다’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지점까지 연결됩니다. 이러면 화자는 자신이 오랫동안 좋아했던 게 비가 아니라 비가 오는 풍경을 즐기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자 그럼 ‘나는 비를 좋아한다’는 첫 전제는 완전히 엉터리일까요? 아닙니다. 처음 비를 좋아했기에 그 인연의 끈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다시 연결되니까요.

  이 시를 끝내면서 터키 시인 Qyazzirah Syeikh Ariffin의 「I am afraid」를 덧붙입니다. 이 시를 끝까지 읽고 난 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시인은 진정 비를 좋아할까요?
  진정 햇빛을 사랑할까요?
  진정 바람을 사랑할까요?
  진정 사랑을 믿을까요?

  "너는 비가 좋다고 말했어, 하지만 우산을 폈지.
  너는 햇빛을 사랑한다고 말했어, 하지만 그늘을 찾았어.
  너는 바람을 사랑한다고 말했어. 하지만 창문을 닫았어.
  이게 내가 두려운 이유야.
  넌 나도 사랑한다고 했잖아."

  *. 이 시가 Qyazzirah Syeikh Ariffin의 작품이란 포스팅은 여럿 보이나, 시인에 관해 알려주는 글은 보지 못해 시인 이름과 시 연결에 긴가민가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두줄시(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