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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ug 07.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65)

제165편 : 함순례 시인의 '다행이다'

@. 오늘은 함순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다행이다
                          함순례

  날 잡아 칼을 갈았다
  무뎌진 날들이 숯물에 배어 흘러내렸다
  주기적으로 갈아야 한다지만
  선득한 날이 싫어
  좀체로 칼 갈지 않고 살았다
  그냥 살아야지, 하고
  작정하자마자 금세 예리해진 칼날
  그 가운데 움찔했던가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다행이다
  내가 먼저 베였다
  - [울컥](2019년)

  #. 함순례(1966년생) : 충북 보은 출신으로 1993년 [시와사회]를 통해 등단 현재 대전에 살면서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으로 활동하며 연간 2회 무크지를 발간




  <함께 나누기>

  한자 ‘利’를 다 아실 겁니다. 보통 ‘이롭다’ ‘이익’ 할 때 쓰지만 원래는 ‘날카롭다’란 뜻에서 왔습니다. ‘利’를 파자(破字)해 보면 ‘벼 화(禾)’와 ‘칼 도(刂)’로 나뉘는데 ‘벼(곡식)를 자르는 칼’이란 뜻을 지닙니다.
  그렇지요, 수확할 때 곡식을 잽싸게 자르려면 칼날이 날카로워야 제대로 벨 수 있습니다. 우리말 ‘날카롭다’도 중세에선 ‘날칼업다’였는데, ‘날칼’은 날이 선 칼이라는 뜻이고 날칼업다를 이어 소리 내면 ‘날카럽다>날카롭다’로 변했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날 잡아 칼을 갈았다 / 무뎌진 날들이 숯물에 배어 흘러내렸다”

  무딘 칼을 쓸모 있는 칼로 바꾸려면 숫돌에 갈아야 합니다. 화자는 '날(日)'을 잡아 '날(刃)'을 갑니다. 녹이 슬면 잘 들지 않으므로 주기적으로 갈아야 하는데 화자는 선득한 날이 싫어 좀체로 칼 갈지 않고 살았습니다.
  자 이제 날을 간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단순히 무딘 칼을 간다는 뜻보단 속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음을 눈치챘을 겁니다. 시어의 함축성이 이때 등장합니다. ‘날이 서다’가 바로 우리네 성품을 날이 서게 간다는 뜻으로.
  세상에는 날이 선 사람이 필요할 때가 종종입니다. 허나 대부분 스스로 날을 갈아 앞에 서기를 두려워합니다. 날 선 누군가가 무딘 세상 난도질해 주기를 바랄지언정 그 자신 날 선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합니다.

  “작정하자마자 금세 예리해진 칼날 / 그 가운데 움찔했던가 /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날이 선 사람은 누군가의 잘못된 언동을 보면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못 배깁니다. 그래서 칼을 휘두르지요. 헌데 누군가를 베려고 하면 자신의 마음이 먼저 베이고 맙니다. 물론 상대의 잘못된 마음도 베어내겠지만.
  그 결과 상대와의 관계는 물론 구경하던 사람과도 멀어집니다. 칼날 휘두를 때 손뼉 치던 사람은 나중에 자신을 휘두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날선 칼을 휘두르면 상대도 아프고 나도 아픕니다. 서로의 마음이 베여 상처가 나 아프기 때문에.

  “다행이다 / 내가 먼저 베였다”

  나의 날을 잔뜩 세우다가 그 세운 날이 나를 베어서 남들 베기 전에 내가 먼저 다침을 다행이라 여기는 자세. 어쩌면 오늘도 날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이 먼저 베이는 아픔 달게 받아들이면서.

  문득 무뎌진 나의 날을 돌아봅니다. 참 많이 녹이 슬었습니다. 다시 날을 세워 보렵니다. 다만 이번엔 누군가를 베기 위한 용도보다 나를 먼저 베는 그런 칼이 되었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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