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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ug 07.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1)

제1편 : '프롤로그'와 '사내(1-1)'

  [프롤로그]



  이 이야기는 2008년 9월부터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한다. 이 해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광우병 파동이 있고 사회적으로 떠들썩한 이슈가 많았지만 그런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냥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사랑에 치인 한 사내와 여인의 이야기일 뿐. 



  [제1편]



             - 사내(1-1) -



  “거기가 사보편집실인가요?”

  숙취에 따른 두통을 참다못하여 잠깐이라도 편집실에 와 눈을 붙이려던 차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자세를 바로 했다.

  “저번 11월호에 실린 기사 때문에 한 가지 여쭤보고자 하는데요?”

  낯선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보(社報) 기사 관계 전화라면 여사원 중 한 명이리라. 나는 언뜻 지난 8월호에 실은 ‘여성 해방 운동의 공과(功過)’란 기사 때문에 호되게 경을 친 일이 생각났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던 기사를 요즘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피곤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특히 여성의, 아니 여사원의 권익과 관련된 문제는 조금만 저들의 신경을 건드려도 즉각 반응이 왔다.     


  8월호의 기사 건도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게 아니었다.

  사보의 기사는 각 부서에서 보내 준 내용을 취합한 것과, 직접 뛰며 취재한 기사(이런 종류의 기사는 사원들의 집을 방문하여 시시콜콜한 내용을 적는데 그리 많지 않음)와, 사원들이 투고한 글과, 외부 저명인사에게 청탁 의뢰한 원고들과, 일간지나 월간지 또는 서적에 실린 글을 인용하는 다섯 유형이 주류를 이룬다.

  그때는 <생각하는 자리>란 난을 담당하고 있던 김 대리가 모 일간지에 실린 미국의 여성잡지 [우먼스 쿼터리]에 실린 글을 재인용하면서 사건은 벌어졌다. 즉, 그 잡지의 편집장 대니얼 크리텐든이 쓴 ‘여성이 남성과 가정으로부터 독립해 홀로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잃고 있다.’라는 요지의 기사를 옮겼는데, 편집 책임자인 나도 그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던지라 요즘같이 페미니즘이 판을 치는 세상에 동양도 아닌 서구에서 이런 시각을 지닌 이도 있구나 하는 색다른 맛에 싣도록 결정했다.   

  그런데 8월호가 나가자마자 여사원들의 모임인 ‘장미회’에서 항의전화가 온 데 이어 대자보(?)까지 게시판에 붙은 것이었다. 사실 우리 같은 중공업 계열 회사에는 여사원 수가 전체의 1%도 채 안 되기에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나 ‘장미회’ 회장이며 현 부사장의 사촌 여동생인 마흔 살 노처녀 최 대리가 문제였다. 결국 부장인 내가 두 단계나 아래인 그녀를 찾아가 빎으로써 겨우 무마시킬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통은 멀리 달아났다. 그러면서 편집실 유일의 상근사원(常勤社員)인 미스 리를 다른 곳으로 보낸 일을 후회했다. 아무래도 아랫사람 있는 데서 두 발 뻗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그렇고 하여 일부러 사장 비서실에 가 기삿거리나 얻어오라고 하여 보냈는데.

  “말씀해 보십시오. 어느 기사가 문제 있습니까?”

  저쪽에서 특별히 어떤 문제점을 언급하지 않았건만 내 목소리는 상당히 사무적으로 변하면서 저음이 되었다. 그리고 엊저녁 부서 회식에서 과음한 걸 다시 한번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을 특별히 무시하는 편은 아니나 혹 언쟁이라도 벌어지면, 아직도 남아 있는 술기로 순발력이 떨어져 적절히 대처 못할 여지가 남았다.     


  “저… 백혈병에 걸린 아이 얘기 있죠. 거기에 대해서 알아보려 하는데요.”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여성 권익과는 아무 관계없다는 판단은 섰지만 그래도 선뜻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어조는 여전히 저음을 유지했다.

  “아이를 돕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고 싶거든요.”

  살았다는 심정에 내 저음은 한 옥타브 올라가면서 부드럽게 풀려갔다.

  “어느 부서의 누구십니까?”

  “저는 거기 근무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아 그럼 남편 되시는 분의 부서와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음을 조절했다. 여사원은 성희롱만 아니라면 적당히 농담도 통하지만 사우(社友)의 부인은 함부로 대해선 안 될 상대였다. 운 나쁘게 높은 분의 사모님이라도 된다면 어쭙잖게 던진 실없는 말 한마디가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으니까.


  “남편도 거기 근무하지 않고 저는 그냥 이 지역 주민의 한 사람이에요.”

  전혀 의외였다. 물론 이 지역 주민 칠십 프로 이상이 우리 회사와 어느 모로든 관련 맺고 있다 보니 외부인이 우리 사보 보는 일이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여태까지 사보에 난 행사에 외부인이 동참해 준 적은 거의 없었다.

  “아 예… 그렇습니까? 정말로 고맙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에 사시는 누구신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 이름은 밝히고 싶지 않고… 그냥 도울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 주세요.”

  “정 그러시다면 계좌번호를…” 하다가 잠시 말머리를 멈추었다.     


  저번 호에 실린 선체생산부 김동민 사우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으나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부모들이 울음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다는 기사는 사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형태로든 돕겠다는 전화가 빗발치고 그리하여 거사적(擧社的)으로 돕기 운동본부가 결성되기에 이르러, 1차 모금한 돈을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광경을 찍은 사진을 다음 호 표지에 내기로 잠정 결정해 놓고 있던 차였다.

  거기에 덧붙여 기삿감도 마련하던 차에 외부에서 돕겠다는 의뢰가 왔으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였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어떤 특별한 매력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고 전형적인 표준 발음이라거나 애교 듬뿍 담긴 소리는 아니었으나, 약간 탁한 듯한 음성에도 발음이 또랑또랑하여 신뢰감을 주는 음성이었다. 뭔가 기삿거리가 된다고 뇌조직은 내게 일러왔다. 그래서 온라인 계좌번호만 가르쳐 주면 그걸로 끝나지만 왠지 알 수 없는 이끌림이 그렇게 간단히 끝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럼 저희 부서로 나오실 수 있겠습니까?”

  “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가령 온라인으로 입금하는 방법 같은 것 말이에요.”

  순간 나의 머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억지로 오라고 했을 때 그게 귀찮아서 포기하거나 또 거기에 더하여 그런 사실을 윗사람이 알게 되었을 때의 위험성이 계속 신호음을 울리고 있었지만 입에선 자연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예 이번에 모금한 금액은 직접 아이의 아빠에게 전달할 계획입니다. 혹시 찾아오기 번거로우시면 저희 직원이 직접 찾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

  하는 말이 조그맣게 들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만,

  “외부인이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경비실에서 통제하지 않나요?”

  “그건 염려 마십시오. 오실 시간만 말씀하시면 저희가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녀는 세 시쯤 도착할 예정이라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한 건 올렸다는 안도감으로 미스 리 책상 위에 메모를 남겨 놓고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머진 그녀가 다 알아서 처리할 터였다.          



  “김 대리, 아침에 맡긴 일 어떻게 됐어?”

  몸은 아직도 정상 가동되기엔 일렀지만 현재 우리 홍보부의 최대 역점 사항인 이 회사 '직전(直前) 회장님 자서전' 자료 수집은 날마다 챙겨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사진이 너무 희미하여 곤란하던데요.”

  김 대리에게 맡긴 일은 청년 시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 가출 후 쌀가게를 차려 기반을 잡을 때까지에 이르는 세세한 이야기였다. 자서전에 실릴 내용은 어디까지나 사실을 원칙으로 하지만 약간의 허구도 허용되었는데 이럴 때 만약 사진이라도 있다면 허구에 날개를 달아 실화로 변모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 참에 그저께 소싯적 회장님의 옆자리에서 어물전을 경영했다는 노인의 소식을 접하게 된 건 큰 수확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맡은 김 대리에게 이틀간 출장 갔다 온 내용을 정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무슨 사진인데?”

  “김 노인… 어물전 노인이 자기 가게를 배경으로 하여 찍은 사진이 있는데 거기 한 곁에 쌀가게가 찍혀 있지 않겠어요. 아직 이 시절의 에피소드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는데 사진이라니! 진짜 특종을 잡았다고 얼마나 좋아했는 줄 아세요? 그런데 제길! 너무 희미해서 쌀가겐지 정육점인지 부식가게인지 뭐가 뭔지 모르겠잖아요.”

  김 대리로부터 건네받은 사진은 정말 그의 말대로 뭐가 뭔지 통 모를 만큼 희미했다.

  “이 부분만 확대하여 선명하게 뽑을 수 없을까?”

  “안 됩니다, 그건.”

  “되게 해 봐. ‘하면 된다’ 그게 바로 우리 왕회장님의 지론이었잖아. 왕회장님 자서전을 가장 빛낼 일을 우리가 지금 한다고 생각해 봐. 그리고 김 대리는 지금 그 기회를 잡았어.”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할 수 없는 건 아무리 그래도 할 수가 없죠”

  “해 봐. 할 수 없는 건 없다고 회장님이 저 위에서 그러시잖아.”

  하면서 특유의 강인한 얼굴로 오연(傲然)히 내려다보고 있는 사무실 중앙의 사진을 가리켰다. 이제 더 이상 군소리가 없을 것이었다. ‘하면 된다’는 구태의연한 구호가 아직 회사 정문에 붙어 있는 이곳에서, 아랫사람으로 당할 때는 열받지만 윗사람으로 아랫사람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는 그만큼 위력이 있었다.

  다시 머리가 찌근찌근 아파왔다. 단지 숙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면 된다’는 말이 갖는 무모함을 익히 겪어 왔기에 동병상련의 심정에서랄까. 물론 김 대리는 만들어 낼 것이다, 어떻게든. 정 안 되면 조작이라도 해서라도 진짜 사진보다 더 진짜 같은 걸 만들어 낼 것이다.     


  그때 바로 곁에 앉은 부서 인턴사원 미스 강 자리 벨이 울었다.

  “부장님, 경비실에서 찾아요.”

  “경비실에서?”

  옮겨 받자 투박하다 못해 꺼칠꺼칠한 경비반장의 목소리를 타고 들려온 것은 웬 여자분이 나를 찾아왔단다. 그러면서 기똥찬 미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그와의 전화를 끊고는 재빨리 편집실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미스 리가 없다면 적어놓은 메모를 보지 못했다는 얘기다.


  부랴부랴 경비실로 내려갔을 때 경비반장과 말을 주고받으며 서 있는 여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약간 작은 듯한 키. 동지를 지난 서느런 햇빛에 반사되어선지 갈색빛이 감도는 살짝 웨이브 진 머릿결. 조금 짧은 듯한 잿빛 코트 아래로 슬며시 내비친 베이지색 스커트. 하얀 바탕에 까만 줄무늬 머플러로 목을 감싸고 선 여인의 모습은 어떤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했을 때 경비반장이 ‘기똥차다’란 찬사를 터뜨린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외모가 어났으나 이마에서 코로 이어진 시원한 선과 특히 수줍음을 담뿍 담고 있는 눈은 누구라도 한번 보면 편매력을 느끼게 하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용모였다.

  그런데 의외로 젊어 보였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정갈한 옷차림이 삼십을 갓 넘긴 나이쯤으로, 선행을 하기엔 확실히 좀 어울리지 않는 나이로 보였다. 선행을 하는 나이가 어디 따로 정해져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여자들, 특히 여유 있는 여자들이 선행이나 봉사에 나서는 연령층은 대개 사십 대 중반 이후로만 알고 있는 나에겐 좀 뜻밖이었다. 그래서 첫인사도 그런 점을 깔고 나온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해 드려서. 그런데 전 나이 드신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잔잔히 웃을 뿐 거기 대해선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사보편집실은 정문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건물에 비하면 중간쯤 위치하나 걸어가려면 제법 시간이 걸려, 그녀의 차는 경비실 옆에 세워 두고 우리 부서 차에 태웠다. 이 지역에 십 년 넘게 살았어도 회사엔 처음 들어와 봤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 분도 채 안 되는 거리를 그녀는 온통 감탄사로 채웠다.

  “오, 굉장히 넓군요!”로 시작해서 하늘에 쭉 걸린 크레인을 보더니,

  “어머, 저걸로 뭘 해요?” 하고는 건조 중인 배를 보더니,

  “어머머, 저렇게 큰 배를 여기서 만들어요?”

  아무도 없으리라고 여겼던 편집실에는 미스 리가 용무를 끝냈는지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는 눈치이더니 내 설명을 듣고 일어나 자리를 고쳐 앉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저어 어디서 뵌 분 같은데 혹시…?”

  “왜 아시는 분이야?”

  은근히 기대를 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려면 아무래도 던질 말이 마땅찮은데 미스 리가 알고 있다면 쉽게 풀어갈 수 있다는 점이 다소 목소리를 들뜨게 했다.

  “아 아니… 제가 알고 있다기보다 언젠가 잡지나 TV 같은 데서 뵌 분 같아서요.”

  갑자기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분명히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가정주부라 자신을 소개했는데 상당히 저명인사란 말이 아닌가. 잘하면 준척(準尺)이 아니라 월척(越尺)이란 느낌에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묘한 건 미스 리의 지적에도 그녀는 예의 부드러운 웃음만 입가에 흘릴 뿐이었다. 더욱이 나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좀 더 그 점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미스 리도 그 이상은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고 그녀도 굳이 밝히려 하지 않는지라 용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도우시렵니까?”

  “적은 액수지만 보탬이 된다면 좋겠어요.” 하며 미리 준비해 온 봉투를 내밀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무슨 상관있겠습니까. 우리 회사와 아무 연고가 없으면서도 돕겠다는 그 마음씨가 중요한 거죠. 참 아까 전화로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다고 하신 것 같은데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까?”

  “네 그러고 싶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사… 부인… 사모님의 이 선행을 사보에 싣고 싶어서 일부러 예까지 오시라고 했는데…”

  “아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그러시면 전 협조하지 않겠습니다.”

  “네에, 정 그러시다면 저희도 그 뜻을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를 배웅해 주고 돌아온 미스 리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궁금했던 점을 다그쳤다. 그러나 아까 처음 보았을 때 안면 있었던 까닭은 며칠 전 지방 TV 대담 프로에 손님으로 나온 그녀를 봤다는 정도뿐이었다. 꼭 필요하거나 재미있었던 프로가 아니어서 분명히 기억하진 못하겠는데 유치원 운영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는 말에서 유치원 선생님이리라는 추측만 남기고 그렇게 첫 만남은 끝이 났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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