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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ug 09. 2024

목우씨의 산골일기(177)

제177화 : 원미근미(遠美近美), 자귀나무

  * 원미근미(遠美近美), 자귀나무 *


  요즘은 한자성어도 만들어내는가, 아내에게서 재미난 말을 들었다. 장미단추(長美短醜)! '멀리서 보면 이쁜데 가까이서 보면 별로다' 할 때 쓴단다. 한자 조어법으로 보면 장미단추보다 원미근추(遠美近醜)가 더 맞다. ‘길고 짧은’ 뜻보다는 ‘멀고 가까운’ 뜻에 더 가까우니까.
  아무리 불볕더위 찜통더위 살인더위라 해도 꽃은 때를 잊지 않고 핀다. 요즘 마을길 나들이에 보이는 꽃은 백일홍(배롱나무)이 으뜸이다. 허나 사람 잘 안 다니는 계곡 쪽을 걸어가면 새로운 꽃이 보인다. 아니 멀리서 보면 꽃이라기보다 분홍과 노랑이 잘 섞인 고운 나비가 사뿐히 내려앉은 모습이다.

  정말 아름답다. 아마 본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리라. 수백 마리 연분홍 나비가 갈맷빛 잎사귀에 내려앉은 모습. 아는 이가 언젠가 우리 마을 방문했다가 저 꽃 보여줬더니 첫눈에 마음 빼앗게 만드는 꽃이며,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하게 만드는 꽃이라 했다.




  그 꽃은 바로 자귀나무꽃! 꽃 모양에 비하면 이름은 조금 거칠다. 어원도 이쁜 의미보다 거칠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허나 염려마시라, 이 꽃을 보고 자귀나무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나무’란 별칭으로 더 자주 불리니까.
  자귀나무 이름의 유래는 대체로 셋으로 나뉜다.
  첫째, 자귀나무로 목재 다듬는 연장의 하나인 ‘자귀’의 손잡이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자귀는 도끼 비슷한 도구로써 목재를 찍어 깎고 가공하는 연장인데, 경상도에선 '짜구'라 한다. (나는 이 설에 방점을 찍는다)
  둘째, 자는 시간을 귀신같이 맞춰 잎을 오므린다 하여 붙었다는 설. 그러니까 ‘자는’의 ‘자’와 ‘귀신’의 ‘귀’를 합친 말이라는데 좀 억지에 가깝다.
  셋째, 부부가 되려면 짝을 지어야 한다는 뜻에서 ‘짝’에 어원을 뒀다는 설. '짝나무 -> 짜기나무 -> 자귀나무'. 이도 음운변화의 원리에 맞지 않다.




  그럼 자귀나무란 거친 이름이 사랑나무로 변한 까닭을 한 번 볼까. 자귀나무가 많은 이의 관심을 끄는 건 잠자는 모습 때문이리라. 낮에는 아카시아 잎처럼 완전히 펼쳐져 있다가 밤이 되면 마주 보는 잎끼리 꼭 달라붙는다. 어느 한 잎도 빠짐없이 자기 짝을 찾아 꼭 껴안은 모습이다.
  낮과 밤의 다른 모습에 우리 선조들이 어찌 그에 맞는 이름 붙이지 않을 수 있으랴. 낮에는 내외하다가 밤에는 정인 품는 모습과 닮았는데. 그래서 애정목(愛情木), 합환목(合歡木), 야합수(夜合樹), 유정수(有情樹)로도 불리는데 우리말로 부르는 '사랑나무'가 적당하리라.


(낮의 자귀나무잎)


(밤의 자귀나무잎)



  사랑나무꽃은 늘 하늘을 바라보고 핀다. 꽃 중에 이런 꽃들이 몇 있다. 해바라기나 하늘말나리는 하늘 향해 얼굴을 든다. 허나 풀꽃이 아닌 2미터 3미터가 넘는 나무꽃 가운데 잎을 아래로 두고 하늘 향해 활짝 웃는 꽃은 극히 드물다.
  마치 잎이 초록색 담요라면 그 위에 피어난 꽃은 분홍빛 구름 같다. 갈맷빛(진초록)과 분홍빛의 절묘한 조화다. 해서 멀리서 볼라치면 사랑나무꽃은 꽃이 아니라 마치 분홍빛 나비가 춤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특히 바람이 불 때면 더욱 그러하다.
  자귀나무를 영어로 ‘pink silk tree’라 하는데 정말 '핑크빛 비단'에 어울리는 꽃이다.

  꽃으로 있을 땐 정물화에 그치지만 바람에 흔들리면 약동하는 존재가 된다. 그 모습의 황홀함은 보고 느낀 이에게만 다가올 뿐. 멀리서 진짜 나비가 나는가 하여 가까이 가 확인하면 더욱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정말 생긴 모습이 나비 같으니 말이다.




  앞에서 원미근추란 말을 썼다. 멀리서 보면 이쁘나 가까이서 보면 추하다는 뜻으로. 허나 사랑나무꽃은 멀리서 봐도 이쁘고 가까이서 봐도 이쁘다. 즉 원미근미(遠美近美)의 꽃이다. 대부분의 풀꽃은 가까이 가야 그 아름다움을 보여줌에 비하여 사랑나무꽃은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다 보여준다.

  사귈 때 외모가 멋지거나 이쁜 사람에게 더 끌림은 본능이다. 일부러 못 생긴 사람을 찾아 사귄다는 말을 들은 적 없으므로. 또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 성격도 좋다는 말도 듣기 참 귀하다. 대체로 외모는 멋지나 행동은 개차반이라는 말을 흔히 듣지만, 외모는 떨어지나 인품은 훌륭한 사람이란 말은 종종 들으니까.
  만약에 외모도 출중하고 인품도 존경받을 만하다면 정말 진국 아닌가. 마치 지위 높은 사람이 겸손하기까지 한다면. (혹 글벗님들께서 겉과 속이 모두 알찬 분을 아신다면 소개해주시길. 진짜 그런 사람 만나고 싶으니까.)

  자귀나무는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그러니 계곡 쪽을 걷다 분홍나비가 앉은 듯이 피어 있는 꽃을 찾으려 들면 보인다. 허나 조건이 있다. 그 아름다움도 그걸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니까.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비록 겉은 좀 쳐지더라도 속이 알찬 사람, 그런 사람은 찾으려 하는 사람의 눈에는 자주 띈다. 사랑나무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만 한 번 더 돌아와 보는 사람에게 그 고움 제대로 보여주듯이 말이다.
  겉은 '어, 좀 부족한데!' 하다가도 속이 아름다운 사람을 오래 보다 보면 시간 지나면 겉도 아름답게 보인다. 오늘 짬을 내서 곁의 사람에게 눈을 한 번 줘보자. 처음엔 원미근추(遠美近醜)일지 모르나 이내 원미근미(遠美近美)로 바뀐 이의 참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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