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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ug 09.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3)

제3편 : 여자(1-1)

  [제3편]



            - 여자(1-1) -


  “갔다 왔어?”
  “네.”
  “사무총장이 무슨 말을 했어?”
  “아뇨, 들은 건 없어요. 그냥 인사만 나누었어요.”
  “정말이야? 같이 점심했을 텐데 아무 말 없었단 말이야?”
  “점심은 하지 않았어요.”
  “아니 왜? 총장이 그런 말 하지 않더란 말이야?”
  “총장님이… 그런 말씀… 하셨지만… 제가… 거절했어요.”
  “뭐야! 왜 거절했어?”
  “몸이 좀 아파서요.”
  “이런 빌어먹을 여편네 봤나! 지금 내 처지가 어떤 줄 몰라서 그래! 총장이 VIP에게 말 한마디만 잘해줘도 공천이 왔다 갔다 한단 말야! 아프긴 어디 아파! 유치원 일이라면 사흘 밤잠을 안 자도 끄떡 않는 년이 뭐 어디 아파? 또 곁에 있기 싫어 핑계 댔지! 이 간이 배 밖에 나온 여편네야! 술 좀 따러 주고 말 상대 좀 해준다고 해서 네 몸이 닳아? 그 사람이 네 몸을 달라든? 또 달라면 주면 어때? 그게 닳는 거야? 나 잘 되는 게 결국은 네년 잘 되는 거잖아!”
  “당신 정말…” 하다가 끊어버렸다.

  이내 다시 울렸지만 코드조차 빼버렸다. 어쩌면 오늘 밤차로 내려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질 폭력… 잠시 현기증이 나 이마를 짚었다. 참으로 싫었다. 그의 말대로 술만 따러 주고 말 상대하는 걸로 끝난다 해도 싫었다. 좌중 내내 이어질 총장이란 사람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감내하기가 너무나 싫었다.
  오늘만 해도 서울에 간 그 사람 - 남편이란 호칭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이 어제 한 번 더 회담장에 안 가면 죽인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지시대로 취향과 거리가 먼 옷차림을 한 채 마지못해 갔는데, 음담에 가까운 말을 들으면서 시종 미소 지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구역질이 난다.
  그 사람에게 총장이란 사람의 한 마디가 어떻다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렇게나 공천을 따려고 이리저리 줄을 대어 현 지도자의 오른팔과 겨우 연결되었는데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야 한다는 것쯤은 아무리 정치에 무감각한 나이지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명색이 아내를 자신의 출세 미끼로까지 사용하리라곤 정말 생각도 못했다.

  작년 지구당 단합대회가 있던 그날, 총장인가 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 식사한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사람이,
  “총장이 말이야, 당신더러 미인이라고 얼마나 칭찬하던지. 여자 보는 눈이 높아도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니라서 웬만한 미스들한테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양반인데…”
  하고 중얼거릴 때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일이 되어갈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그날 이후 그 사람은 정치 행사장엔 꼭 나를 데리고 갔다. 원래 정치인들 모임에 안사람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들끼리만 모일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엔 여자들이 항상 동원되었다. 도대체 어디서 데려왔는지 술집여자 티가 거의 나지 않는, 나중에 들은 말로는 여대생들인데 아르바이트로 그런 곳에서 일하는 애들이라든가…
  처음엔 솔직히 몰랐다. 의원님들 비서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자리에 그 사람은 꼭 나를 데려가 은근히 총장이란 사람 옆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총장 비서가 무슨 일이 생겨 올 수 없기에 대신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진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집에 돌아와 그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한 번 따졌다가 죽도록 얻어맞고 난 뒤에는 그런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설마 했는데 밤중 같이 들이닥쳤다. 그 사람과 전화를 끊고 난 뒤 진짜 머리가 욱신욱신하여 진통제를 먹고 얼마나 잤을까. 귓전에 울리는 현관 벨소리에 문을 열자마자 복부로 날아온 주먹에 ‘악’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다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리를 끌어올리는 바람에 일어섰고 이어서 두 볼에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쓰러진 가슴 위에 짓밟은 발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 쌍년! 이제 설마 날 죽이겠냐는 배짱은 아니겠지?”
  입을 열어 뭐라 하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잘 들어둬! 너 까짓 거 하나 호적에서 지우기는 아무것도 아냐! 오갈 데 없는 계집을 이만큼 자리 잡게 해 줬으면 은공을 알아야지! 지가 뭐 요조숙녀라고 값을 튕기고 있어! 이년아, 너는 네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명심해! 아무리 네년이 지금은 유치원 원장이고 또 이 지역에서 제법 알려졌다 해도 내 한 손가락이면 끝나! 알긴 알아, 이년아!”

  다시 머리가 끌어올려졌다. 그리곤 돌려세워졌다. 거칠게 팬티가 벗겨지는 걸 느끼면서 숨을 쉬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억지로 머리를 들어 아들 방 쪽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다. 온 힘을 쥐어 짜내며 소리쳤다.
  “빨리 문 닫아!”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경우를 여러 번 당해선지 문이 닫히는 걸 보며 뒤를 쑤시며 들어오는 그 사람의 것을 의식하였다. 그리고 혀를 이빨 사이에 들이밀었다. 그러나 깨물 수 없었다. 아들, 조금 전 엄마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 아들의 얼굴이 가로막았다. 뒤에서 짐승 같이 헉헉대는 소릴 들으며 눈물을 비 오듯 쏟았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사람 아닌 짐승과 산다는 걸. 나와 그의 겉모습만 본 사람들은 아무도 절대로 믿지 않을 터이었다. 어디 가서 털어놓을 데도, 털어놓을 수도 없는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유치원 경영자 동부지구 모임’에 나갈 때까지 흉터가 남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눈 가장자리에 조금 남은 멍은 전에 원아들과 연극을 할 때 필요해서 구해놓은 도수 없는 안경으로 처리할 수 있었고, 다만 약간 부은 볼이 조금 신경 쓰였다.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치도곤을 당해 몸이 엉망이 돼도 억지로나마 유치원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여태까지 그 사람이 때릴 때 교묘하게 때린 덕(?)이랄까. 죽도록 패도 며칠 전처럼 얼굴에 외상 입힌 적은 결코 없었다. 아니 외상이야 있었지만 모두 옷 속에 들어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리라. 아니 아무도 몰라야 했다. 만약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 그 사람은 정치를 포기해야 하지만 그보다 전의 생활로 돌아갈 게 뻔했다. 법적으론 멀쩡한 기업을 운영하는 것 같으나 뒤에선 불법과 비리가 따르는 일들. 벌어들이는 돈보다 무마하는데 더 돈이 드는 일들. 그 돈으로 검찰청 차장 부장 검사랑 또 부장판사랑 형아우가 되었고, 거기에 집권당 사무총장과도 돈독한 사이가 되었으니. 그러니 겉으로나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할 현재는 예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목욕탕에 간 게 언제인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한 군데든 멍자국은 언제나 훈장처럼 함께 했다.  권투선수가 상대를 때려눕힐 때처럼 복부를 강타하거나, 태권도선수처럼 발로 허벅지나 옆구리를 차거나, 그래서 골병은 들었을지언정 외관상 드러나지 않으니 엄청나게 아파도 일은 볼 수 있음을 진정 다행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구타로 사흘간이나 쉬었으니…
  나 때문에 수업 부담을 더 안은 선생님들에게도 미안하지만 특히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이 환경에서 그나마 마음을 붙이고 사는 건 모두 아들과 원아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막아버리다니… 처음엔 억지로라도 나가려 했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순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TV 드라마 같은 데 나오는 파충류 형상의 흉측한 외계인이 거기 있었다.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얼굴 바로잡기에 정성을 쏟은 결과 오늘에야 사람들 앞에 드러낼 정도가 되었다, 그것도 무도수 안경을 끼고서야. 자꾸 맞다 보니 역설적으로 면역이 생긴 덕에 좀 더 일찍 일어났다고 할까. 맞는 게 겁이 나면서도 워낙 맞다 보니 견딜 수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오늘 회의의 주 안건은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과당경쟁을 피하자는 안이었다. 경영하는 사람들은 경쟁이 주는 피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체하여 왔다. 이 안건은 이번이 처음 아니었다. 먼저 유치원비를 십팔만 원 하자고 결의했을 때만 해도 제대로 지켜지겠지 했는데 한 곳에서 십육만 원을 받는 바람에 이내 허사가 되었고, 두 번째 역시 그런 식으로 결의했으나 이번에는 한 곳에서 원복과 가방을 무료로 주는 바람에 또 허사가 되었다.
  문제는 원아 수에 비하여 너무 많은 유치원이 난립하는 바람에 제 살 뜯어먹기 식 경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원칙을 위반하면 협회에서 제명시킨다 해도 겁을 내지 않음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오늘도 위반 유치원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방에 이어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졌다. 정말이지 이런 논쟁은 싫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게 현 회장이 나라는 점이었다. 몇 번이나 회장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억지로 떠밀려 맡은 지 이미 삼 년째였다.
  대부분 여성이 경영자인 유치원 원장들의 모임에서 회장은 실상 허울뿐이나 그 허울을 좋아하는 여인의 심성상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장수하고(?) 있는 건 표면상으론 이 지역에 가장 오랫동안 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외압을 막아줄 수 있다는 뒷배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었다. 시 전체에서의 영향력은 몰라도 이 지역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저는 반대합니다. 지금 주변 회사들의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많이 해고되는 등 원 운영이 최대의 위기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박원장 님 같은 능력 있는 사람이 맡아야지 다른 사람이 해선 제대로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소모적인 논쟁에 이어 새로 회장을 뽑자는 제안에 나를 칭찬해 주는 김 원장님의 말이 하나도 기쁘게 들리지 않는 것은 마음이 이미 떠났기 때문일까.
  “… 흔히 하는 말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새 사람이 새로운 방식으로 좀 더 활기 있고, 통솔력 있게 끌어 나갈 때라고 봅니다. 저로선 한계가… ”
  “그래도 박 원장님보다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이 어디…”

  “김 원장님이 박 원장을 높이 평가하는 건 좋은데 우리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요. 사실 회장 하는데 무슨 머리 쓸 게 있다고….”
  내 말을 가로막으며 나온 유일한 남자 원장인 김 원장의 말도 이내 잘렸다. 평소에 사사건건 불평불만이 많아 ‘싸움닭’이란 별명이 붙은 최 원장의 말이 이때만큼은 반가웠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그래요. 누구든 하겠다는 열의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봐요. 어때요, 최 원장님께서 한 번 해 보시는 게?”
  옆에서 다른 이들이 뭐라고 했으나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다행은 그녀가 발뺌하지 않으려는 점이었다. 아니 다행이라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마음먹고 온 게 분명했으니. 그래도 그녀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왕 내친김에 전임 회장 턱으로 오늘은 내가 먼저 고기를 살 테니 신임회장 턱으로 다음에 사라고 하여 고깃집으로 데려옴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때 그를 만났다, 바로 그 불고기집에서. 전에 한 번 그를 만난 적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만약 그쪽에서 아는 체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의 모습은 변해 있었다. 우리 일행이 고깃집에 막 들어서는 순간 어디에서 날아오는 시선을 느껴 언뜻 보니 저쪽 좌석에서 회식을 하는지 이 지역 회사의 근무복을 입은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모임이나 개방된 장소에 갈 때 가끔씩 남자들의 눈길을 느끼곤 했으나 아직도 익숙지 않아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께름칙하여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다시 그쪽을 슬며시 보았더니 한 남자가 이쪽을 보며 목례를 보내는 게 아닌가. 처음엔 나를 향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일행만 해도 열 명이 넘었기에.

  그러나 내 뒤를 따라왔던 신임회장 최 원장이,
  “박 원장은 어디 가도 남자들에게 인기 있어”
  하는 반쯤 질투 어린 말을 듣고서야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음을 알 수 있었으나 말은 전혀 달리 나왔다.
  “저보단 최 원장님을 보는 듯하는데요.”
  일행들과 식사를 하면서도 앉은자리가 그쪽을 빤히 건너다보는 위치라 시선이 그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와 몇 번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를 하는 걸 분명히 느꼈다.  만약 최 원장이 나와 같은 위치에서 보았다면 분명히 한 마디쯤 나왔을 만큼 확실히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궁금했다. 이런저런 일로 사람 만날 일이 많다 보니 만난 사람마다 다 기억할 수야 없지만 그래도 웬만한 사람은 다 기억했는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궁금증이 해결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는데 입구에 그가 있었다. 문득 일부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반갑습니다. 이런 데서 뵙게 되는군요.”
  “누구신지…?”
  조심해야 했다. 그 사람의 눈과 귀가 도사리고 있는 좁은 이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 귀에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들어간다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발의 끝은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잡았다.
  “기억나지 않으시는가 보죠. 왜 저번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셨잖습니까?”
  그제서야 생각났다. 잠시 보고 지나친 것도 아니고 삼십 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기억 못 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군대 입대하려는 장정들마냥 너무나 짧게 자른 머리와 지나친 경계심이 기억력을 후퇴시켰음에 틀림없다.
  “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너무 젊어지셔서 제가 몰라 봤어요.”
  “아뇨,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일행이 있는 것 같은데 바쁜 사람을 잡아서. 드릴 말이 있는데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그와 헤어져 자리로 돌아오면서 끝에 던진 말이 조금 걸렸다. 할 말이 있다는 것과 나를 어떻게 알기에 찾아오겠다고 했는지 그게 걸렸으나 일행의 수다에 묻혀 곧 잊어버렸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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