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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ug 10.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4)

제4편 : 사내(2-1)

  [제4편]



            * 사내(2-1) *



  “이번 호 회장님 동정(動靜) 난은 옥스포드대 명예법학박사 학위 수여로 정했습니다. 우리 회사의 차갑고 억센 이미지를 부드럽고 지적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표지 사진도 이걸 했으면 어떨까 하는데요?”

  “동정 기사로는 괜찮지만, 표지 사진은 저번 호도 회장님 얼굴이 나갔는데 조금 식상하지 않을까요?”

  “HOT NEWS 난은 우리 조선사업부에서 이룬 10만 톤급 LNG선 수주로 정했습니다.”

  “해양설비부에선 인도네시아에 천연가스 시추용 잭-업 플랫폼 수주한 게 기사거립니다.”

  “플랜트사업부에선 컨테이너크레인 일본 수출로 잡았습니다.”

  “엔진사업부에선 환경친화형 디젤엔진 개발이라는 월척을 낚았습니다. 환경을 중시하는 현시점에 돋보일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가능하면 톱 자리를 원합니다.”

  “우리 중전기사업부에선 처음 시도한 유도전동기 미국 수출로 톱을 잡을까 했는데 이번엔 양보해야겠군요.”

  “사우 가족 방문은 자재부 김 민성 사원으로 할까 합니다. 결혼한 지 두 달 된 MZ세대 부부의 오손도손 사는 모습이 쉰세대 사우들에게 색다른 맛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사내 사업장 방문은 건설토목부로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회사의 이미지완 이질적인 곳이라 충분히 시선을 끌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외부 매스컴을 탄 사우는 없어요?”

  “왜요. 히말라야를 정복한 산사나이 특수선생산부 한철우 사우가 있잖습니까? 벌써 8,000미터급만 세 번째입니다.”

  “문화란은…”

  “우리 고장 순례는…”


  사보 편집 마감일이 되면 스무 평 남짓한 편집실은 장터로 변한다. 평소에는 상근사원인 미스 리만 있다가도 이때가 되면 각 부서의 사내 기자들이 다 모여 어느 것을 실을 것인가 정하는데 모두 자기가 취재해 온 기사를 톱으로 싣고 싶은 욕심이 많다 보니 어떤 땐 말다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다행히 이번은 목청 높일 일 없이 부드럽게 풀려갔다.

  본시 홍보부의 주 업무는 모든 대내외적인 자료 - 사보나 대외 홍보용 자료 등 -를 문서화하거나 사 내외 행사 주관하는 일을 맡으므로 실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요 부서의 하나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중요 사항의 대부분은 기획실 등의 부서에서 결정했고, 다만 홍보부에서는 거기서 입안해 놓은 것을 토대로 문서화할 뿐이며, 사보라 해도 각 부서에 있는 사내 기자들이 모아 온 자료를 정리ㆍ편성하는 정도였으며, 그리고 회사의 운영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잡다한 행사들만이 온전히 우리 홍보부 소관이었다.


  “참 이번 외부 청탁 원고는 정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부서로 돌아간 뒤 사보 편집 관련 실무 책임자 네 사람만 남은 상황에서 아까 매듭짓지 못한 사항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던 중 김 대리가 던진 말이었다.

  “아까 결정 안 했어?”

  “아 맞다. 그걸 빠뜨렸네요.”

  내 말에 미스 리가 받았다.

  “시간도 얼마 없는데 이번엔 그냥 비우죠.”

  평소에 굼뜬 행동으로 곰이라 불리는 송 과장의 말이었다. 행동만 굼뜬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벌이지 않으려 해 눈총을 받던 인물이었다.

  “안 돼. 다른 때보다 알차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마저 비우면 너무 빈약해.”


  여태까지 한바탕 말씨름하다가 다시 머리 짜내야 할 일이 생겨선지 다들 짜증 나는 모양이지만 그냥 어물어물 넘어갈 순 없었다.

  “교육 분야가 어떨까요. 전에 한결고등학교 선생님이 썼던 대학 입시 관련 기사가 호평을 받았잖아요. 한 번 더 써 달라면 안 될까요?”

  “그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이다만 같은 내용의 기사는 실을 순 없고…. 그것보다 구술면접이 요새 각광받잖습니까. 그 방면 전문가에게 부탁을 해 보는 게 어떨까요? 그쪽 전문가라면 글도 쉽게 쓸 거고...”

  미스 리의 말에 이어 김 대리가 받았다. 잠시 동안 갑론을박하다가 일단 교육 관계의 글을 싣기로 정했다.


  그러자 문득 한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러면 어떨까, 저번에 대학 입시를 실었으니 이번엔 유아교육에 관한 글이? 짜임새가 있을 것 같은데.”

  의외로 쉽게 만장일치였다. 최종 결정 시엔 아무리 상사가 내놓는 안이라 해도 철저히 따지도록 버릇 들여놓았기에 언제나 반발을 예상해야 했는데.

  “그럼 부탁하는 일만 남았네요. 누구에게 부탁하죠?”

  “미스 리 친구 가운데 유치원 선생님 없어?”

  하는 김 대리의 말을 끊은 건 나였다.

  “잠깐, 그 안은 내가 제안했으니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내가 매듭짓지.”

  귀찮은 혹을 떼 준다는데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조심스레 번호를 눌렸다. 마침 ‘꽃지 유치원’에 다니는 애 아버지가 옆 사무실에 있어서 그녀가 원장이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네, 제가 원장입니다만…”

  처음 전화를 받은 여선생님에게 원장님을 바꿔 달라 하자 이내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음성은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이번에는 나를 소개하자 금방 알아차리고 이내 반가운 듯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궁금하긴 궁금한 모양이었다.

  사정을 얘기하자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나 거절의 강도가 약하여 희망을 가졌다. 다시 부탁하자 역시 거절이었다. 그러나 글재주가 없어 곤란하다는 변명은 다시 부탁을 해도 좋을 만한 느낌을 갖게 했다. 거기서 자신감을 갖고 설득했다. 이 지역의 원아를 둔 어머니를 위해서, 또 원아교육의 홍보적 차원에서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곁들였다. 확실히 처음보다는 거절의 강도가 훨씬 떨어졌다. 자기 말고 능력 있는 사람을 추천해 주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 정도라면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불쑥 찾아와서 당황하셨죠?”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그날 오후에 찾아갔다. 원아들은 다 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고, 동료 교사로 보이는 몇 분과 아이들의 작품인 그림을 정리하던 중인 듯했는데 그녀는 확실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희들은 먹잇감… 아 죄송합니다. 늘 우리끼리 쓰는 말이라 무심코 나와버렸군요. 저희들은 필자를 한 번 찍으면 놓치지 않는 게 불문율로 돼 있습니다.”

  우선 들어오라고 하여 따라 들어간 원장실은 넓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깔끔하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첫마디를 그와 연결해 던졌다.

  “거처하는 곳에는 그 사람의 성품이 배어 있다던데….”

  “그럼 실망하셨겠네요?”

  “아뇨, 전 솔직히 첫인상과 이 방 분위기가 그렇게 어울릴 수 없어서 깜짝 놀라고 있던 참입니다. 한 점 잡티를 잡아낼 수 없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대답 대신 입을 살포시 가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그 모습에 한 마디 덧붙였다.


  “이번 호 포토에세이에 실은 수묵화 한 편이 떠오르는군요. 실같이 개울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 귀여운 다람쥐 형상의 바위 옆에 넌출진 버드나무, 그 아래 풀밭에 앉아 호드기를 부는 소년, 그리고 한 켠에서는 소가 꼴을 뜯어먹는 그림인데, 먹을 엷게 풀어놓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절로 그 속에 잠기고픈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가 오늘 또 그런 분위기를 맛보는군요.”

  “사보 일 담장 부장님이시라 그런지 표현이 아주 살아 있네요. 그렇지만 제 얼굴을 너무 화끈거리게 하진 마세요.”

  아까 전화로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역시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먹잇감을 찍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하면서 ‘절대’란 말에 억양을 실었다.


  자기 말고 글을 잘 쓰며 유치원 교육에도 일가견 있는 사람을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어린이는 인간 가운데 가장 순수한데 그런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남을 돕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 간직한 원장님 같은 분 아니면 곤란하다고 했다.

  저번 조금 도와준 걸로 사람 전체를 평가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신은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 못 된다고 했다.

  사람을 평가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남이라고 했다.

  그러자 글을 못 쓰는데 하며 여운을 남기기에,

  저는 제가 판단한 사람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은 그걸로 끝이 났다.



  “저 당신과 의논할 일이 있어요…”

  옷을 걸어주고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아내가 말을 건넸다.

  “뭔 일인데?”

  “… 전에 제가 ‘ㅇㅇ의전화’ 얘기 한 적 있죠?”

  재빨리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분명히 기억의 주머니 속에 한 줌 들어있었다. 한 달쯤 전인가 아내가 봉사하던 ‘ㅇㅇ의전화’에서 자리 하나를 맡을지 모른다고 했다. 처음 그 일 시작할 때만 해도 거기 속한 강좌에 나가 배우고자 하는가 싶어 어머니 병 수발에 매여 하고 싶은 일 제대로 못하는 게 안쓰러워 시간이 허락한다면 하라고 아주 쉽게 응락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미 아내는 바깥으로 자주 못 나가는 대신 집에서 거기 홈페이지 관리와 신입회원 통신교육 등을 무려 오 년 동안이나 하면서 나름대로 기반을 닦아오고 있었던 터였다. 나중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내게 말 안 하고 그런 일 계속해 온 게 괘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집 안 일에 피해 주지 않고 그만큼이나 해 온 게 오히려 대견하기까지 해 그냥 넘겼다.

  한창 공부해야 할 아이들 시중에다, 시도 때도 없이 엉뚱한 말과 행동하는 시어머니의 뒤치다꺼리와 청소ㆍ빨래를 하다 보면 하루해가 결코 길지 않을 지경인데 그 시간들을 쪼갤 대로 쪼개어 자기 일을 해 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아서였다. 하지만 말 끝머리에, ‘저 어쩌면 인권위를 맡을지 모르겠어요.’란 말을 들었을 때 안이하게 생각했던 걸 후회해야 했다.

  그냥 집에서 짬짬이 일을 하는 거와 한 조직의 리더가 되어 거기 상근해야 하는 거와는 크게 달랐다. 우리 형편에 거기 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을 꺼내자 아내가 그때 쉽게 한 발 물러서기에 그렇게 끝난 줄로 알고 있었는데...


  “저 그 일 꼭 하고 싶어요.”

  “일하고 싶다니?”

  “특별한 사안이 발생하기 전엔 오전에만 거기 가 있고 나머지는 집에서 하기로…”

  “됐어.”

  “오전만…”

  “됐다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사실 그동안 참아준 것만 해도 무던하다고 여기던 중이었다. 누구보다 자유의지로 한껏 세상을 활개 치며 훨훨 날아다니던 여자였다.  그러나 나와 결혼함으로써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는 굴레에 씌어 살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니 아내에게 지금의 생활이 갇혀 있다는 의식이 들 수밖에 없다는 걸 충분히 알았고, 내색하지 않고 있을 때면 늘 미안하다는 느낌은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던 참. 그러나 이번처럼 해결 방안이 나올 수 없는 얘기를 꺼내면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고모가 오전은 봐줄 수 있다고 했어요.”

  “됐다니까.”

  “무조건 됐다고 하지 말고 제 말도 좀 들어보세요. 우리만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느냐 하는 따위의 말은 안 할게요. 대신에 고모와 삼촌이 제게 조금의 여유는 줄 정도의 협조는 할 수 있잖아요. 물론 그쪽들이 다 힘들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더니 고모가 허락하시던데 왜 당신은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세요?”

  누나가 오전 동안 어머니를 봐주겠다고 한 말은 사실일 게다. 그러나 난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알고 있다. 남동생은 부부가 함께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장사를 하니 마음이 있어도 돌봐 줄 엄두를 못 내고, 그나마 조그만 식당을 경영하는 누나가 우리 가족이 모두 나들이해야 할 경우에 하루 이틀 정도는 봐주었다.

  허나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반드시 후유증이 따랐으니…. 식당이라고 하나 누나 모자가 거처하는 방에 조그만 홀 하나 딸려 있는데, 어머니가 방에만 있어주면 괜찮으나 꼭 홀로 나오려고 해서 손님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 식사하는 자리에 중풍에다 치매 걸린 노인이 기어 나와 말도 되지 않는 소릴 해대니 제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고서도 허락한 것은 손아래 올케에 대한 미안함도 미안함이지만 자식으로서의 죄의식에서 임을….


  “저도 어쩔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런데 이번에 새로 회장 된 사람이 당신도 잘 아는 최미옥 선배예요. 자꾸만 권유하기에 안 된다고 했더니 언니가 당신을 만나 설득하겠다고 하는 걸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도 사실 전부터 맡고 싶었던 일이구요.”

  “조금만 기다려. 어머니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어?”

  “그런 말하고 지내온 게 내년이면 십 년이에요.”

  이런 형태의 말투는 전에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가능한 나의 입장을 배려하여 언제나 말했지 지금처럼 이죽거리는 말투를 아내에게서 들은 적이 결코 없었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해서,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말이나!”

  하며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뭐라고 대꾸하면 받아치려 했으나, 아내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보면서 언젠가 누나가,


  ‘아마 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간 큰 남자이거나, 아니면 올케가 가장 어리석은 여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라고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여태껏 다툼이 있을 때마다 아내 쪽에서 내 신경을 건드리는 말과 행동을 많이 자제했다는 게 상기됐다. 분명히 내가 받는 괴로움보다 저가 받는 힘듦이 더 클 거였는데도 말이다. 한 마디 안 할 수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당신한테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조금만 참아 줘.”



  “어머니는 요즘 어때?”

  “늘 그래. 변함없어.”

  “식사는 제대로 하셔?”

  “잘 드셔. 너무 잘 드셔서 큰일이야. 오래 사실 것 같거든.”

  “하긴 십 년이 다 됐지? 오랜 병에 효자 없다던데. 그래도 할 수 없잖아. 부모와 자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잖아.”

  이래서 친구는 좋다, 언제나 힘든 부분부터 다독여 주니까. 바로 옆 부서에 있어 회사에선 자주 만나도 막상 밖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총무부장이란 직함은 일정한 퇴근시간이 없었다. 일이 없어도 일찍 나가기가 쉽지 않지만 일 있을 땐 밤샘까지 각오해야 했다. 특히 친구는 노조 관계 일도 맡다 보니 노조 대표와 항상 유대를 깊게 해야 한다고 거의 매일 회식을 했고, 내가 시간 나면 녀석이 없고 녀석이 혹시 시간 나면 내가 없어 만나기가 어려웠다. 오늘도 만사 제쳐놓고 만나자는 녀석의 닦달에 부서 회식이 있었건만 얼굴만 내밀고 빠져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천사 얼굴 본 지도 오래됐는데 물론 잘 있겠지?”

  천사는 녀석이 아내에게 붙인 호칭이다.

  “집 얘긴 그만하자. 골치만 아프니깐.”

  “짜아식, 잘해 줘라. 요즘 그런 여자 없다. 넌 매일 천사를 업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도 모자란다. 미래의 여자 국회의장 감을 데려와 겨우 솥뚜껑 운전사로 만들어놨으니. 그건 그렇고 너희 부서는 요즘 어때?”

  “뭐 변화 있을 리 있나. 고작 기사 쪼가리 모아 짜깁기 해 허접한 책이나 펴내는 부서에서. 참, 넌 요즘 한가하겠군. 노조 파업이 쑥 들어갔잖아. 이런 시국에 앞장섰다간 당장 모가진데 누가 하겠어?”

  “넌 같은 회사에 근무하면서 일 돌아가는 걸 그렇게도 몰라? 내가 노조 일만 보나, 다른 일은 얼마나 많다고. 그건 그렇고 내 말은 대상자 정하는 일이 어떻게 돼가고 있느냐는 말이야. 사실 그것 때문에 보자고 했어. 미칠 지경이야. 누굴 자르고 누굴 남기느냐 말야.”


  아직 우리 회사는 불경기 속에서도 큰 타격은 받지 않아 1차 구조조정은 퇴직이 얼마 안 남은 사람들 중에 퇴직금을 좀 더 얹어주거나 하청업체를 대폭 줄여 본사 인원을 거기 배치하는 등 하여 겨우 비켜왔지만, 정부 차원에서의 구조조정 압력과 공장자동화로 대규모 인원 감축에 대비하여 솎아낼 사람 명단을 몰래 작성해 놓으라는 소위 2차 구조조정 안이 사내에 퍼지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해 있었다. 결국 그것이 나중에 살생부가 될 터이니 말썽이 안 날려야 안 날 수 없었으니.


  “우리도 마찬가지지 뭐. 어느 부서든 뾰쪽한 수 있겠어.”

  “어제 해외영업부 최 부장 만났더니 똑같은 소릴 하더군. 그러면서 재미있는 심사 기준을 가르쳐 주던데 한 번 들어 봐. 일 년에 세 번 이상 술 사준 친구는 안 자른다. 설, 추석을 잊지 않고 선물한 친구도 안 자른다. 마누라가 자르지 말라고 한 친구도 안 자른다. 그 사람 잘랐다간 밥 못 얻어먹을 테니깐. 또…”

  “됐어, 싱거운 소리 그만해.”

  “오죽 답답하면 그런 소릴 하겠어. 넌 그래도 담담한 걸 보니 원칙을 정했나 보네. 너 혼자만 써먹지 말고 가르쳐 줘.”

  “내세울 건 아니지만 능력보단 성실, 독존보단 인화, 아부보단 줏대, 포기보단 근성. 이렇게 정하니까 대충 눈에 보이더군.”

  “말이야 좋다. 그래 그렇게 하면 너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애. 얼마 전 우리 상무랑 술 한 잔 하면서 넌지시 물었더니 부장은 이사가, 이사는 상무가, 이런 식으로 몇 명 도마 위에 올려놓기로 했다는 거야.”

  그건 의외였다. 부장 선에서 그 아랫사람 구조 조정이란 박 이사의 말을 전적으로 믿은 게 잘못이었다. 그만큼 순진했다는 것일까. 순진하지 못한 세상에 순진하다는 것은 바보라는 말보다 더 심하다. 내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러면 대상자가 누가 되었는지 불을 보듯 환하다. 쓰디쓴 맛이 입 속에 가득 찬다. 이번에도 처삼촌이 애써 주겠지만 그게 더 씁쓸하다.


  “너무 심각할 건 없어. 난 요즘 이렇게 생각해. 버티고 있는다 한들 오륙 년이야. 운 좋게 승진하면 그만큼 또 피 말려야 하잖아. 그건 그렇고 플랜트사업부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어디 외국에 대규모 수출이라도 해, 사보에 낼 만한?”

  “진짜 못 들은 거야? 플랜트의 온달 부장 말이야.”

  “아, 난 또 뭐라고. 그 얘기 모르는 사람 어디 있어?”

  “그럼 둘이 사표 냈다는 것도 알아?”

  “사표 냈어? 결국 그리되었구먼….”


  온달 부장으로 불리는 민 부장과 노처녀 미스 김의 러브스토리는 그의 마누라가 회사에 쳐들어와 발칵 뒤집어 놓는 바람에 순식간에 사내에 퍼졌다. 부장만 해도 이백 명이 넘는 이 회사에서 웬만한 부장은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기 동기들이 늦어도 이사고 심지어 상무까지 있는 만년 부장으로 아직 잘리지 않고 있는 게 더 신기하게 여겨지던 사람이라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적었다.

  그런 사람이 갖출 건 다 갖추었으나 콧대가 너무 높아 시집을 못 갔다고 평가받는 사장 비서 김미옥 씨와의 불륜이 알려졌을 때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장 어벙한 사내와 가장 튀는 여자의 결합은 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에 비유되었고, 자연히 그 둘의 얘기는 사내의 톱뉴스가 되어 술집에서 가장 많이 불판 위에 오르던 메뉴였다.


  “그 얘기 듣자 우리 나이 정도면 애인 안 가진 사람은 팔불출이란 잡지 기사가 문득 떠오르더군. 솔직히 한편으론 꽤나 부럽더라.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도 나이 차지만 탤런트 뺨치는 미모에, 지성, 덕성에다가 색성까지 갖추었다는 여자를 가장 얼빵해 보이던 사람이 낚아챘으니….”

  “너는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천하의 박 강쇠가. ‘돈 주앙’의 미스 리, ‘박카스’의 송 마담, ‘에뜨랑제’의 미스 정이 다 네 것이라 했잖아.”

  “그건 사랑이 아냐. 순간적인 성욕의 분출일 뿐이지. 나는 지금 사랑을 말하는 거야, 사랑.”

  “네 입에서 사랑이란 말이 다 나오다니, 어떤 의미로든 온달 부장은 결코 실패한 인생은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실패한 인생이라니. 사람이 산다는 게 뭔가? 나도 그렇게 살아오긴 했지만 인정받기 위하여 동료들과 아등바등 싸우고, 조금 더 잘 살려고 부동산이니 주식 같은데 투자하고, 별 것 아닌 것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이런 걸까? 아냐, 결코 아냐. 우린 너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 자신의 감정을 속이며 말야.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마지막 보헤미안인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건배!”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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