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황인숙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칼로 사과를 먹다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1994년) #. 황인숙 시인(1958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한때 동아일보에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를 연재하면서 시 읽기 붐 조성하는데 기여함. 이 시인에게 ‘4無시인’이면서 ‘4有시인’이라는 말이 붙는데, 집ㆍ 돈ㆍ 남편ㆍ 아이가 없어서 4無시인, 시ㆍ 친구ㆍ 무소유 정신ㆍ 베풂의 미덕이 있어서 4有시인이라 함
<함께 나누기> 오늘 배달하는 시는 정끝별 시인이 ‘한국인이 애송하는 시 100편’을 모아 해설을 단 책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에 실린 작품입니다.
시골 살면 집안일을 혼자 처리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수리할 곳이나 뭘 만들어야 할 경우 기술자 부르면 돈이 드니까요. 물론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일은 어쩔 수 없이 맡겨야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부분은 제가 합니다. 문제는 하고 나면 매끄럽지도 이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꼭 잔소리합니다. 수용 못하면 말다툼이 생기고. 제가 한 일이 대부분 이쁘지 않은데 유일하게 과일 깎는 일은 꽤 합니다. 껍질 얇게 깎으면서도 먹음직스럽게 보이니까요. 헌데 깎은 과일을 가끔 시에서처럼 깎던 칼로 집어 먹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아이구, 다치면 어쩌려구!” 하는 말을 내뱉고. 동남아시아 관련 TV나 유튜브를 보면 우리와 다르게 과일 깎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일 깎을 때 칼날을 자기 쪽으로 당기며 깎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칼날을 바깥으로 밀며 깎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밖으로 깎지 않음은 앞에 상대가 있으면 불안하게 여길까 배려하는 자세에서 나온 관습이라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칼을 건넬 때도 반드시 칼등을 잡고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해야지 반대로 하는 행위는 금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칼이 날카롭기 때문에 생겨난 금기인데,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도 그런 의도에서 생겨난 금기로 보입니다.
화자는 사과를 껍질의 붉은 조각이 구불구불 길어지도록 예쁘게 깎는데 마치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 예쁘게 자른 사과를 먹으려 포크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칼로 집습니다. 순간 언니가 한 마디 합니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칼날이 날카로우니 자칫하면 칼에 베일까 봐 조심하라고 하는 말인데 뜻밖의 뜻이 담겼습니다. ‘칼로 음식 찍어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는 미신의 일종이면서 금기에 해당합니다. 날카로운 칼날이 자칫 내 입을 벨까 봐 조심하라는 뜻이 담김은 같지만 '내가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를 주목합니다. 나의 행위로 하여 누군가 피해볼지 모르는 일이 생긴다는.
“세상에는 /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무엇을 찍으면 나에게만 피해 오는 줄 알았는데 그 일이 다른 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니. 뭔가를 남에게 준다는 일이 이렇게 위태로울 때가 종종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든 상대에 대한 배려든 그게 아픔이 될 경우도 있다니.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 사람들이 떠오르고” 이제 칼로 사과를 찍어먹는 행위가 말 그대로 포크 대신 사용함이 아니라 뭔가 남에게 (나쁜 )영향 줄 수도 있다는 함축적 의미로 넘어갑니다. 단순히 나만 피해 입는 게 아니라 남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그래서 화자는 “아아, 그때 나, / 왜 그랬을까……” 하고 뉘우칩니다. "나는 계속 /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이 시행을 누군가에게 아픔을 준다고 해석하기보단 남에 대한 배려로 혹은 남에 대한 사랑으로 보아 그에게 갈 아픔을 내가 감당하겠다는 뜻으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게 시 읽는 맛겠지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음이.
“(젊다는 건, / 아직 가슴 아플 /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 그걸 아직 / 두려워한다는 건데.) 이 시에서 가장 힘준 시행입니다. 시 읽어오다 다른 부분은 그냥 읽고 넘어가나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표현에 밑줄 치리라 싶습니다. 젊으니까 이런 행동 저런 행동 다 했습니다. 그 말은 더 아프고 더 두렵고 더 힘든 일 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칼로 사과 찍어 먹듯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젊음을 그렇게 넘어왔습니다. 젊음의 언덕을 한참 넘은 지금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시행입니다. 내가 사랑이라고 여겼던 일이, 내가 배려한다고 생각했던 일이 상대에게 아픔을 주지 않았는가 하고.
*. 첫째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둘째는 배우 이시원의 인스타그램 (2020.12.01)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