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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Sep 06.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21)

제21편 : 여자(12) + 사내(13)

  [제21편] : 여자(12)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 선생님에게서 한 여자 손님이 찾아와 원장실로 올려 보냈다는 인터폰을 듣고 원아 상담을 하러 온 학부형인 줄 알고 일어서다가 잠시 호흡을 멈춰야 했다. 그이의 아내다. 황급히 몸을 움직여 신문을 치운다, 탁자를 닦는다, 차를 끓인다 하며 마음을 추스르기에 바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상대였지만 지금은 준비가 안 된 상태.

  마주 앉았다. 전에는 경황이 없어 얼굴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꽤나 이지적인 용모. 그러나 편안한 느낌보다 만만히 대할 수 없는 기품이 흘러나오는 여자이기도 하다. 그이가 자기를 만나지 않았으면 화려하게 살았을 것이란 말을 떠올리며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불편한 만남이지만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우리 집은 지금 쑥밭이 되었거든요.”

  고개를 숙였다. 뭐라 변명할 말이 없다.

  “그이는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기고, 이번엔 아들까지 납치당할 뻔했고….”

  고개를 들었다. 죽을 고비가 세 번이었다니. 한 번의 고비와 아이 납치 건은 아는 사실이지만 두 번은 몰랐다. 그렇다고 이 여자가 거짓말하는 건 아니리라. 내가 놀랄까 봐 그이가 감추었 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조만간 바깥에 알려질 거고. 그러면 그이도 타격을 받겠지만 그쪽은 더 심각하겠지요. 자세히 설명 안 해도 충분히 그려지는 시나리오니까요.”

  이 여자는 한 가지 오해하고 있다. 그이가 타격받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난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이를 위해서라면 헤어질 수 있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그 정도의 양식은 있는 분으로 알아요. 그럼 믿고 갑니다.”


  일어나 배웅할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사라지는 거다. 진짜 사라지는 거다. 미워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서 사라지는 거다. 이빨이 부러지도록 이를 악물고 사라져야 한다. 아들이 걸린다. 아들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 죽음에는 동반할 수 없으나 멀리 떠나는 데는 동반해야 한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제 자식을 잡아먹겠냐마는 그 애를 두고 홀로 갈 수는 없다.

  언뜻 외국을 생각했다. 사람들로부터 단절되기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관광은 몰라도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어찌 살까. 자신이 없다. 그래도 여권은 만들어 놓아야겠다.

  나라 안을 생각했다. 어디가 좋을까, 섬, 산 하다가 그이가 전에 얘기한 지리산 밑 약초 재배 부부가 떠오른다. 어떻게 이리될까. 그이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데 그이와 연관된 곳이 떠오르다니. 지워야 한다. 그이를 지우지 않는 한 영원히 떠날 수 없다. 진실한 사랑은 구속이 아니리라. 나는 사랑을 핑계 대며 그이를 옭아매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해 줄 수는 없었을까.



  친구에게 전화했다. 도청을 염려하여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이 외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 너무 담담하게 얘기해선지 친구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정말이니?’를 몇 번이나 사용했을까. 겨우 반신반의의 상태. 계획을 얘기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나보다도 바깥출입이 적어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사연을 얘기하다 보니 거기까지 얘기하게 되었고.

  친구는 그때까지 확신이 서지 않던지 한 번 더,

  “정말이니?”

  하고 물어서 또 한 번 확인해 줘야 했다.

  “장기간 네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한 곳이 있기는 한데….”

  별 큰 기대는 안 하면서도 어디냐고 물었다.

  “애들 아빠 고향이 남해 욕지도거든. 지금도 시어머니가 거기 살고 계셔.”

  “큰 섬이니?”

  “아니, 하지만 필요한 건 다 있어서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는 곳이야. 학교도 중학교까지 있어.”

  학교는 전학이란 과정을 거치다 보면 주소가 들통나기에 다른 방법이 없으면 한 해 휴학을 시킬 작정이다.

  “알아봐 줘.”


  우선 돈이 필요하다. 내 명의로 된 유치원을 처분하는 게 가장 확실한 자금줄이지만 소문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적금해약, 보험해약, 수중에 있는 현금을 합치면 이천쯤 될까, 그걸로 얼마를 버틸 수 있을까. 가서 직업을 구하기만 한다면 다행이지만 섬에 가서 내가 할 일이 있을까. 언젠가 TV에서 본 적 있는 등을 굽힌 채 바지락 캐는 아낙네들이 떠오른다. 정 안 되면 그거라도 할 자신은 있다. 다만 그걸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을지 염려지만.



    - 사내(13) -



  “좀 만나.”

  그 사람이다. 그동안 어찌 된 영문인지 별다른 위협이 없으나 수나에게 연락이 안 돼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져 있던 참이다.

  “멘스 이제 끝났어? 어디서 붙을까?”

  “개새끼 농담 아냐! 좀 만나.”

  “일대 일로 붙을 일 아니라면 날 만날 필요가 없을 텐데.”

  “여편네가 애 하고 사라졌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래서 녀석의 말투가 점잖아졌다는 걸 의식 못했다.

  “나도 필요하지만 너도 필요하잖아.”

  사실이다. 단지 전화할 형편이 못 돼 안 한 줄 알았는데…. 유치원부터 들렀더니 이 선생님도 얼떨떨한 상태. 며칠 전에 찾아와서 당분간만 맡아 달라고선 갔다 했으니, 차후로 종종 연락하겠다면서.


  녀석과 만난 장소는 호텔 커피숍. 거기서는 어떤 장난도 없을 터. 녀석은 대뜸 나를 의심한다. 내가 빼돌려 놓았다나.

  “나는 오히려 네놈이 두 사람을 어떻게 하지 않았나 의심이 드는데. 지금 이 자리서 분명히 해명하지 않으면 신고한다!”

  “솔직히 마누라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어. 하지만 아들은 아냐.”

  딱 잘라 단정적으로 말하는 녀석에게 진심이 보인다. 순간 우리 둘은 무언의 일치를 보았다. 그녀가 우리 두 사람 몰래 사라졌다는 걸. 녀석이 휴전을 제의했다, 찾을 때까지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내가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고 하자 사과를 했다. 믿기지 않는 일.

  “네 말 어떻게 믿어?”

  “내 성격이 더럽기는 하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킨다.”

  동의를 했다. 하지만 녀석이 내미는 악수는 거절했다.



  건 전화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는 걸 떠올린 건 순전히 전에 그런 일로 한 번 당했기 때문이다. 유치원과 그녀 집에서 사용한 통화내역서 빼내는 일이 조금 힘들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고, 특히나 다행스러움은 외지(外地)로 건 전화가 몇 군데 아니어서다.

  부산에 건 전화가 모두 여섯 통인데, 한 곳에 네 통 다른 곳에 두 통이므로 두 곳만 확인하면 되는 일도 크게 어렵지 않다. 더욱 두 통 건 데는 유치원 비품과 직접 관계있는 공장이었으므로 나머지 한 군데가 친구라는 사실은 뻔한 일. 그녀 성미에 가장 친한 친구라면 수차례 전화했을 테니까.


  유도 질문보다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박수나 씨 친구죠?’ 하고.

  이내 반응이 왔다, 잔뜩 긴장된 음성으로,

  ‘댁은 누구세요?’ 하고.

  정공법(正攻法)은 언제나 길을 만들어 준다는 진리가 이번에도 통한다. 이왕 내친김에 엉뚱한 이름을 대는 것보다는 바로 나 자신을 밝혔다.

  ‘박수나 씨로 하여금 현재 고통받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하고.

  저쪽에서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전달되는 숨소리를 통하여 친구는 그녀가 어디 있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추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번에는 돌려 말했다. 바로 그녀 있는 데를 물으면 분명히 모른다고 시치미 뗄 테니까.


  “다른 건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무사한 거죠? 아무 일 없는 거죠? 다시 말해서 남편으로부터 해를 당하거나 한 건 아니죠? 지금부터 십 초 동안에 거기 대해서 아무 말 없으면 경찰에 실종 신고할 겁니다. 어디 있는지는 정말 묻지 않겠습니다. 무사한지 않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십 초를 세겠습니다. 그때까지 대답 없으면 죄송하지만 정말 신고할 겁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그녀의 친구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은 건 ‘아홉’ 하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였다.


  이제 친구의 집 주소를 알아내는 일이 급선무. 도청을 하든지 하여 그녀 있는 곳을 알아내는 건 다음 문제. 주소는 형사친구의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도청에는 협조해 줄 수 없다 한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도청하는 일도 반대한다고. 법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자 그녀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때와 같은 정도까지는 협조해 주겠다고. 그 정도면 만족. 이미 머릿속은 구상을 끝냈으니까.

  그녀 친구의 통화내역서를 쥔 뒤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건 그녀가 적어도 도심지에 있지 않을 거란 추측. 그녀의 여린 성미에 그럴 배짱은…. 그렇다고 해도 대도시 아닌 곳은 모두 대상이 된다. 지역번호가 찍히지 않은 건 부산이니 필요가 없고, 02, 053, 032, 042, 052, 062 같은 대도시 지역번호가 찍힌 곳도 제외시켰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가려 나가다 보니 한 곳이 나타난다.

  ‘055 - ×××-××××’

  그 지역의 전화번호부를 구해 주소지를 알아내기까지는 하루를 꼬박 새워야 했다. 이틀 월차를 냈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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