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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Sep 05.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20)

제20편 : 사내(12)

  [제20편] : 사내(12)



  “너 그놈한테 당한 거지?”

  아내에게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도 형사부장인 친구가 찾아왔다. 사건사고를 점검하다가 내 이름을 봤다나, 믿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주의를 줬잖아, 조심해야 한다고. 그래도 이만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난 저들이 그녀를 미행할 줄 알았지 나를 미행할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 그녀 뒤만 유심히 챙겼는데….”

  “이 바보야, 저놈들은 프로야. 넌 무조건 당하게 돼 있어. 네가 아무리 머리 굴리고 운동신경이 잽싸도 필연코 당할 수밖에 없어. 저놈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가르쳐 줄까? 네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돼도 저놈들을 어떻게 할 수 없거든. 수사하면 고작 브레이크 손댄 것만 찾아낼 뿐이지. 그것도 누가 한 지는 알 수 없고. 그 작자는 심문해 보나 마나야. 그 시간대의 알리바이는 완벽할 테니. 부하 한두 놈이 손 봤을 거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있어? 게다가 그놈은 공식적으로 십 년 전에 그 패거리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걸로 돼 있거든. 우리 서장에게 넌지시 운 떼 봤더니 켕기는 데가 있는지 내켜하지 않아. 다시 말해서 네 상대는 골리앗이야. 그러면 네가 다윗이 돼야 하는데 내 보기엔 어림없어.”


  “아무튼 고맙다, 충고해 줘서. 내 나으면 근사한 데서 한 잔 사지.”

  “짜아식 배짱 하나는 그저 그만이다. 사내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참 널 도와줄 게 뭐 있을까 해서 며칠째 그 집 근처에 매복시켜 놓았거든, 서장 귀에 들어가면 시말서 감이지만. 그런데 어젯밤 그 집 부인이 자해소동을 일으켰는가 봐.”

  “자해소동을? 어디를?”

  링거가 꽂힌 것도 의식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링거보다 갈비뼈 두 개가 나갔다는 말이 실감 나게 가슴 쪽이 끊어지듯 아프다.


  “흥분하지 마. 아직 뼈가 제대로 붙지도 않았을 텐데, 쯧쯧…. 조금 전 병원에 보낸 형사에게서 연락을 받았는데 혀를 깨물었는가 봐.”

  “혀를? 생명은?”

  “흥분하지 말래두. 생명은 지장 없다 해. 그리고 당장은 힘들지만 말하는 것도 시간 지나면 괜찮을 거라 하니 너무 염려 안 해도 될 거야.”

  쓰러지듯이 몸을 뉘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짐승이라는 사람과 관계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너희 두 사람 인연은 진짜 인연인 것 같다. 나중에 용한 점쟁이, 아니 요즘은 역술인이라 한댔지. 역술인에게 가서 한 번 물어봐.”



    제 얘기 듣고 웃지 마세요.

    절대로 웃으면 안 돼요.

    제가 전에 점을 친 적 있거든요.

    웃지 말라고 했잖아요.

    전 하느님을 믿기에 점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그런데 제 친구, 전에 얘기한 부산 산다는 가장 친한 친구가 그런 데 관심이 많아요.

    한 번은 같이 가 보자고 하도 조르기에 호기심에서 따라갔거든요.

    정말 호기심뿐이었어요.

    그런데 그 점치던 아저씨가 저더러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글쎄 제가 전생에 직녀였대요, 직녀.


  “뭘 생각해?” 

  “아 아무것도...”

  “그럼 나 간다. 이런 몸이 돼 있는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혹시 손병철에게 연락 오거나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항을 알게 되면 꼭 연락해 줘. 부탁한다.”



  “그 여자 대단한 미인이던데요.”

  아내도 이런 면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언제부터예요. 저를 속인 게?”

  귀찮았다.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내색을 할 수는 없다.

  “당신답지 않군요. 저에겐 항상 당당했잖아요.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고 들어와서도 큰소리치며 당당했잖아요. 이 정도쯤 되면 ‘그만해!’ 하고 소리 지를 때가 됐잖아요.”

  묵묵히 창을 건너 마주 보이는 성당의 첨탑을 바라보았다, 입원한 뒤로 습관적으로 하루에 몇 번씩 수나는 저기 계신 분께 고백을 했을까 하며.


  “사람이 자꾸만 유치하게 되더군요. 이 남자 이제 포기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죠. 처세술도 경제력도 잔정도 없이 오직 똥고집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이 남자를 여태까지는 십여 년 이어온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이제 제 마음대로 날아가도록 해 주자. 그리 마음먹으니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런데 그 여자를 보니까 오기가 솟아나잖아요, 빼앗길 수 없다는. 제 얘기 유치하죠?”

  역시 입을 열 수 없다.

  “어쩌자구 하필이면 그런 위험한 여잘 선택했어요? 꽤 알려진 여자던데요. 누군가 입만 벙긋하면 월간지의 톱기사가 되겠더군요. 선행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미모의 유치원 원장과의 불륜….”

  “그만해, 됐어. 너답지 않아, 이죽거리는 말투는.”

  “저답다는 게 뭐예요. 바람피운 남편에게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는 것, 남편과 관계 맺은 여자에게 뺨 대신 위로한 것, 제가 당신 친구들이 쓰는 말처럼 천사가 되어야 저답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도 속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걸요. 그걸 다만 내색하지 않았다는 차이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왜 이러는지. 그냥 내팽개치고 가버린들 박수칠지언정 욕할 사람 하나 없을 텐데 왜 이러는지 ….”



  “절 잊어주세요.”

  신체적으론 큰 이상은 없으나 정신적 충격이 심하여 정신과 병동으로 옮겨졌다는 형사 친구의 전갈을 듣고 그냥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아직 옆구리가 결리긴 하지만 힘든 일을 하지 않는 한 움직일 만했다. 다시 친구의 도움으로 아무도 없을 때를 알아내 들어온 병실이다. 그녀의 눈에 찰나적으로 반가운 기색이 도는 듯했으나 애써 표정을 달리하며 꺼낸 말.

  “진심이야?”

  “… 진심이에요.”

  “내 눈을 보고 다시 한번 똑바로 말해.”

  고개를 들고 이쪽을 잠시 보다가 옆으로 튼다.

  “잊어 주세요. 저도 잊겠어요.”

  창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병원 병실의 위치가 참 묘하다. 대부분 다른 병원 병실에서 내려다보면 속셈학원, 1급자동차 정비공장, ㅇㅇ증권, ㅇㅇ은행, 커피숍 등이 보이는데 이 병원 모든 병실에선 성당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곳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다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냐. 여기서 성당이 빤히 내다보이는데, 지금도 날 보고 하느님을 믿느냐 하면 ‘예’라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어. 그렇지만 여기 오기 전에 기도를 드렸어. 태어나 최초로 기도를.


    하느님, 그녀를 미워하게 하소서. 

    하느님, 그녀를 증오하게 하소서.

    하느님, 그녀의 모든 걸 경멸하게 하소서.

    하느님, 그녀의 티끌만 한 흠결을 태산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소서.

    하옵시면 하느님, 그녀가 제게 했던 모든 언행이 거짓이었다고 고백하게 하소서.

    그래도 미흡하시면 하느님, 그녀가 얼마나 가식의 인물이었나를 제발 깨닫게 해 주소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를 벗어나려 한 죄의 값으로 가장 큰 벌을 내려주소서.

    온유의 하느님, 저는 이 뜻을 잘 모르지만 사람들을 편히 해 주는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오니 하느님, 제발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노라는 말을 하도록 해 주십시오.

    편할 때는 못 본 체하다가 아쉬울 때 손을 내미는 축생(畜生)의 잘못은 익히 아오나

    하느님, 그래도 어리석은 양의 갈무리는 정녕 해주지 않으시렵니까.

    죽어도 사랑한단 말 한마디 하도록 해 주신다면 하느님,

    당신 위해 손과 발이 먼지가 되도록 빌고 또 빌겠습니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사랑하는 여인에게 떨어지는 형벌을 제게 모다 떨어뜨리시면 초열지옥에 간들 무슨 원망이 있으오리까.

    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죄지은 자 벌 받는 것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부탁하오니 그녀만은 제발 지옥에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거기서도 보고 싶은 게 제 소원입니다만 하느님,

    다시 한번 비오니 그녀에게 오는 모든 형벌을 제게 제게만 내려 주시옵소서.


  목에 두르는 가녀린 두 손을 느꼈다. 돌아섰다. 껴안았다. 그녀가 나보다 더 힘차게 안는다. 가슴 통증이 느껴졌으나 이내 사그라든다. 입맞춤하려다 깨물었다는 그녀의 혀가 생각나 힘을 줘 끌어당기니 곤두 선 가슴의 돌기가 느껴진다.

  “널 갖고 싶어.”

  “안 돼요, 여기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느낄 땐 피해선 안 돼.”

  “그래도 안 돼요. 누가 들어오면 어쩔려구 ….”

  “문을 잠갔어. 부수고 들어오라면 들어오라지.”

  엉덩이에 손을 넣었다. 고무줄로 된 환자복은 손의 침입을 쉽게 허용한다. 이내 팬티 속에 두 손을 넣어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입에서는 단내가, 귀로는 잔음이 말초신경을 일으켜 세운다. 끝까지 가고 싶었으나... 서로의 얇은 환자복을 벽을 삼아 세워둔 채 잠시 그대로 서 있다. 어떤 때는 완벽한 결합보다 부족한 결합이 더 짜릿하다. 지금이 그렇다.


  침대에 붙어 앉았다. 심장의 고동은 옆구리를 통해서도 전달되는가.

  “미안해, 환자한테.”

  “괜찮아요. 진수… 님이 찾아오지 않기를 빌면서도 한편 저도 무척 바랬어요.”

  “이 세상의 여자가 너와 같다면 모든 가정은 파괴될 거야.”

  “왜요?”

  “어느 한 군데 모자람이 있어야 할 텐데 환자라도 만지고 싶도록 매력을 발휘하니까.”

  “제 눈에 안경이라고 당신 눈에만 그런 거예요.”

  “당신이란 말 처음 들어보네.”


  그때,

  “어머 이게 뭐예요?”

  하며 그녀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휴대폰이다. 진동에 놀라 일어선 모양이다. 낯선 번호. 전에 당한 일을 생각하며 어쩔까 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형사인 친구였다. 옆에 다른 형사 시켜서 건 전화라며 무조건 경찰서로 오라 하지 않는가, 병원에는 자기가 얘기한다면서. 걱정스런 낯빛을 한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춰 주고는 일어섰다.



  작은애가 제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있다. 아내는 나를 쏘아보더니 애를 데리고 일어서 나간다.

  “무슨 일이 있었어?”

  “쟤가 납치당할 뻔했어.”

  학교에서 돌아오던 중에 납치당할 뻔한 걸 미행시켜 놓은 형사의 도움으로 구출했다나.

  “그 새끼들 잡을 수 있었는데….”

  친구는 놈들을 놓친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전화를 했다. 그 사람은 지구당 사무실에 있었다. 친구에게 한 시간 뒤 이쪽으로 전화만 한 통 넣어 달라고 하면서 일어섰다. 친구가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 물증도 없는데 자칫 잘못하면 너까지 다쳐.’란 말로 사양했다.



  “개새끼”

  이번엔 내가 욕을 했다.

  “뭐, 저 새끼가!”

  주변의 인물들이 더 흥분했다.

  “잠깐, 간이 배밖에 나온 친구 오늘은 어쩐 일이신가?”

  유들유들한 낯짝을 그대로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저들에게 먼저 빌미를 줘선 안 된다.

  “비겁한 새끼, 이젠 어린애들까지 노려!”

  “뭐”

  하며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이 달려드는 걸 살짝 피하며 옆구리를 발로 찍었다.

  “호오 여기서 폭력까지 행사하신다. 대단한 배짱이야. 야 밖에 나가 봐라, 누굴 데려 왔는지.”

  “걱정 마, 나는 홀몸이야. 치사하게 뒤에 죽치고 앉아 부하들이나 시키는 놈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이 새끼가!”

  녀석이 일어섰다. 어차피 빼어든 칼이었다.


  “우리 일대 일로 붙자, 진 사람은 모든 걸 포기하기로. 아 이러면 네가 손해 본다고 여길 테이니 내가 진다면 자살하지. 유서를 써서 너한테 뒤집어씌우진 않을 거니 그건 걱정 마.”

  “호오, 나랑 일대 일로? 진짜 대단한 놈이군. 합기도 3단이라고 까부는가 본대 지금은 안 돼. 그렇다고 네놈이 무서워 피한다고 생각 마. 곧 사진도 찍어야 하고 얼굴 내밀 데도 많거든. 만에 하나 상처가 나면 안 되지. 어때 오늘 돌아가면 적당한 날 잡아 내 연락해 주지.”

  “비겁한 새끼. 그래놓고 뒤에서 치려고.”

  “이 새끼 진짜 말로 해선 안 되겠군. 내 생애 처음으로 양보했는데. 좋아, 맛을 보겠다면 맛을 보여줘야지. 얘들아….”


  “형님 전홥니다.”

  “누군데?”

  “남부서 형사부장이랍니다.”

  “또 어떤 새끼가 사고 쳤어?”

  “그 그런… 소식 못 들었습니다. 급히 형님 바꿔 달래는대요.”

  전화로 받는 표정은 떫은 감 씹는 표정. 그리고 수화기를 막은 채 나를 향해,

  “개새끼, 형사부장 하나 믿고 여태 큰소리쳤어? 뭐 친구가 거기 갔는데 급히 연락할 말이 있다구? 완전히 짰잖아. 개새끼, 받아!”

  “괜찮아. 일대 일로 붙자니까 피하더군. 그래서 컨디션 좋은 날 하쟸지. 아마 놈은 오늘 멘스 하는 날인가 봐.”

  완전히 일그러지는 녀석을 보며 통쾌하게 전화에 대고 말했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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