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Oct 14.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02)

제202편 : 신현정 시인의 '염소와 풀밭'

@. 오늘은 신현정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염소와 풀밭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 [염소와 풀밭](2003년)


  #. 신현정 시인(1948년 ~ 2009년) : 서울 출신으로 1974년 [월간문학] 통해 등단. 서울에서 고교 교사를 그만둔 뒤 카피라이터와 광고 및 편집 회사를 운영하다가 15년 전에 세상을 떠남




  <함께 나누기>


  염소를 키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녀석이 얼마나 별나고 얼마나 키우기 상그러운지. 일단 묶어놓지 않으면 제대로 만든 문도 다 들이박아 넘어뜨리고 아무거나 다 먹어치웁니다. 그러니 우리를 아주 튼튼하게 만들거나 묶어둬야 합니다.

  거의 모든 풀은 염소의 먹이가 되며, 심지어 식물로 만든 종이나 지폐와 담배조차 먹어치웁니다. 염소가 진짜 담배 먹느냐 알아보니, 담배 재배하는 농가에서 담뱃잎이 솟아오를 때면 그 잎을 가끔 뜯어먹는다고 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화자는 어느 날 푸른 풀밭 말뚝에 매어있는 염소 한 마리를 봅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정경 속에 염소가 풀을 뜯고 있습니다. 묶여 있다는 것만 빼면 참 목가적인 장면입니다. 헌데 ‘묶여 있다’, 워낙 활동적인 염소가 묶여 있다?

  풀밭에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는 염소는 묶여 있는 관계로 다른 곳에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줄이 그리는 둥근 원 안에서만 놀아야 합니다. 대신 원 안의 모든 걸 소유한 염소는 말뚝에 매인 줄의 길이에 따라 그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둥글게 경계를 그립니다.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만들어내는 세상의 경계, 사실은 인간이 만들게 했지만, 그 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 대신 그 안에 있는 모든 풀은 염소의 것입니다. 거기의 풀은 개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가까이 오면 머리로 다 박아버리니까요.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 그의 것”


  염소는 묶인 줄이 그리는 원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모두 다 차지합니다. 그러니까 영역 안에서는 염소가 왕입니다. 풀뿐 아닙니다. 그 테두리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도 새들도 오직 염소의 것입니다. 비록 한순간 머물지라도.


  “그러하냐”


  원 안의 풀, 구름, 새가 염소의 것이라 했는데 마지막 시어가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하냐’ 이 시어 뒤엔 아마도 물음표가 붙어야 할 듯. ‘그러하냐?’ 답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 앞에선 분명히 원 안의 것은 모두 염소 소유라 하고선 ‘아니다’ 하는 부정의 답을 끌어내려 할까요?


  이제 염소가 진짜 가축인 염소만 가리킨다고 여기는 글벗님은 안 계시겠죠? 바로 우리 인간 비유하고 있음을. 줄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말뚝에 묶인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걸 두고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겠지요.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범위의 삶 (말뚝 안의 삶)을 즐기며 자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게고, 매인 삶이 주는 갑갑함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을 터. 시인은 마지막에 시어 ‘그러하냐’를 끌고 와 만족스럽지 않다는 식으로 끝맺으려는 듯합니다. 왜 그럴까요?


  시인에게 염소가 풀밭 줄에 매인 채 원 안의 영역만 돌고 있는 게 참 안타까운가 봅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아무리 넓은 땅에 살아도 그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렇게 여길 수도...

  염소는 줄을 끊고 풀밭을 자유로이 내달리고 싶어 할지 모릅니다. 단 처음부터 염소를 묶어두면 그런 마음조차 잊고 살겠지만. 자 묶여 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걸 다 소유하는 삶이 좋은지, 아니면 비록 내 것은 적더라도 영역 밖으로 나감이 좋은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 바로 위 컷은 네이버 블로그 [진달래약사의 시시한 이야기]에서 퍼왔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두줄시(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