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학기 시인(1959년생) : 전북 고창 출신으로 1981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직업의 소유자. 영어교사, 신문기자, 시인, 논픽션 작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배우, 영화감독.
그래도 그의 인생을 축약하자면 ‘문학과 영화’로 말해짐. 시와 소설 쓰며,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배우도 영화감독도 하고 있으니... 현재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
<함께 나누기>
십여 년 전쯤 시골 작은 우체국에 근무하던 고향 후배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퇴직함) 그와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제가 물었습니다. ‘요즘 우체국에 편지 보내는 사람 적어 할 일 줄었겠네.’ 하고. 후배가 정색을 했습니다. '택배랑 은행 업무가 늘어나 전보다 훨씬 일이 늘어났는데 무슨 소릴!' 하며.
이어 또 물었습니다. ‘요즘도 손편지 쓰는 사람 있느냐?’고. 가끔 편지가 가뭄에 콩 나듯 하나씩 보이면 '야!' 하는 감탄사를 직원들이 터뜨린다나..
시로 들어갑니다.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라고 쓴 뒤 창 밖을 본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지나갔습니다. 우리 마을만 해도 하늘로 가신 어른, 새로 들어온 사람. 이사 나간 사람. 아직 병원에 계신 분. 아는 이 가운데 40년 동안 함께 살던 분을 얼마 전 멀리 보냈고. 또 다른 이는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다시 만나 이곳저곳 여행하며 다닌다 하고.
"철새들이 날아간 하늘 밖 풍경은 구름 떼들이 모여 있다"
이맘땐 올 철새 갈 철새에겐 준비 기간입니다. 여름철새는 갈 준비를, 겨울철새는 올 준비를 해야 하니... 철새가 날아다니면 흔적 남습니다. 구름과 가장 친밀도가 높으니 거기에 자기들의 발자국을 새깁니다. 그래서 철새 날아간 허공엔 새의 발자국이 찍힌다고 하지요.
"창 곁으로 다가가 구름의 얼굴, 가슴을 들여다본다"
화자는 창 곁으로 다가가 구름의 얼굴과 구름의 가슴을 들여다봅니다. 거기서 어쩌면 철새의 흔적을 찾으려 함일지도. 아니면 철새가 전해주는 먼 곳에 사는 그리운 이의 소식을 알아보려 할지도. 그러니까 구름은 많은 얘기를 간직합니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다 간 흔적들이 묻어 있어 따뜻하다"
화자가 철새가 지나가면서 구름에 낙서한 자국의 의미를 찾아냈습니다. 사람들의 흔적 말입니다. 이제 곧 낮과 밤의 기간이 같을 때가 다가오고 밤이 더 길어지면 그믐달도 그의 얘기를 편지 대신 전해줄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쓴 편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내가 편지가 된다"
철새도 구름도 달도 별도 소식 전하건만 정작 손편지 우체통 없으니 내가 편지가 되어 그에게로 갑니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도 그리워할지 모르나 그에게로 향하는 뜨거움만은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편지를 부치러 오는 사람들이 없는 거리의 우체통 속으로 / 많은 날들이 또 구름 떼처럼 지나간다"
요즘 우체통은 편지 받지 않습니다. 영수증 아니면 고지서나 받을 뿐. 우리 집 같으면 박새가 둥지 틀지도 모르고. 더 이상 사람들은 손편지를 쓰지 않으니 편지를 부치려 가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편지가 되어 보는 일도 괜찮지 싶습니다.
아 손편지, 이 말 하면서도 사실 뜨끔합니다. 그냥 편지면 편지지 손편지라니. ‘e-mail’이 생긴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손’ 한 글자를 덧붙여야 합니다. 제게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은 품목 몇을 대라면 펜으로 쓴 편지입니다. 연필로 힘을 줘 쓴 편지든, 잉크로 써 번진 편지든, 참 그립습니다.
*. 첨부한 스캔 자료는 45년 전 제자들에게 받은 편지 가운데 하나로 "첫사랑의 편지"란 제목으로 실었던 자료입니다. 보관해 오던 중 비가 스며들어 버린 편지가 천여 통, 남은 편지가 오백여 통 되는데, 제가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