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병록 시인(1982년생) : 충북 옥천 출신으로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이 시인의 이름 뒤엔 ‘농사짓고 소 키우는 집에서 자란’이 붙어 있고, 현재 경기도 일산에서 글을 쓰며 책 만드는 일도 함
<함께 나누기>
해마다 정초가 되면 뭔가 다짐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그 다짐한 바를 수첩이나 휴대폰 메모장에 적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컴퓨터(또는 노트북) 모니터에 붙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다짐한 바를 실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지요.
헌데 어떻습니까? 과연 다짐한 항목 가운데 이룬 항목은 얼마나 될까요? 제 경우엔 반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반성하지요. 다시는 정초에 이루지 못할 다짐은 하지 않겠다고. 허나 다음 해도 똑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저는 아예 다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연말이 되어도 실천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허면 제 마음은 편할까요? 아뇨, 도대체 올 한 해를 뭘 하며 지냈는지 결과물이 하나 없으니 더욱 힘듭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우리 /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 처음도 아니잖아요"
‘비장하다’, 정말 비장하게 올 목표를 세웁니다. 어떤 이는 목표 옆에다 이런 글귀도 붙입니다. ‘망(忘)하면 망(亡)한다’ 잊어버리면 망한다는 뜻. '처음도 아니잖아요' 슬쩍 비트는 장면입니다. '처음도 아닌데 뭘 그리 비장하게 다짐하느냐'와 '다짐을 어긴 게 처음이 아니잖아'로.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 서랍을 열면 /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있겠어요"
제발 다짐 좀 하지 마세요. 그동안 공수표 발행한 적이 몇 번입니까. 아예 다짐의 '다' 자도 꺼내지 마세요. 당신이 다짐한다고 새겨 넣어둔 약속 묶음이 서랍 속을 꽉 채우고도 남음 있으니까요. 그러니 제발 다짐 좀 하지 마세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성현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내용입니다. 목표를 세우지 말고 앞날에 대한 계획도 말고, 작은 약속도 하지 말라니까요. 우린 목표가 서야 성취욕구가 생기고, 앞날에 대해 계획을 세워야 실패할 확률이 적고, 약속을 하지 마라가 아닌 약속을 한 뒤 지켜라로 알고 있는데...
“겨울이 와도 /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달력이 두 장 남짓 남았습니다. 지난봄에 다짐한 바를 떠올리니 참 부끄럽습니다. ‘다짐’란에 동그라미 치려니 칠 게 없으니까요. 허나 봄을 반성하지 말랍니다. 봄은 금방 흘러갑니다. 다짐을 실천 못하면 잠시 아플 뿐 금방 잊어버립니다.
해마다 다짐과 목표를 정했으니 그걸 다 펼쳐놓으면 운동장을 다 덮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걸 실천 못했으니 반성한 적만 몇 번입니까. 저는 다짐조차 안 했으니 아예 시작도 전에 포기했습니다. 일단 출발선에 섰으면 뛰게 마련인데 거기 서지도 못했습니다.
오늘 시는 아는 이의 결혼식 축사로 썼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는 두 분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았다고. 결혼을 앞두고 여러 다짐(약속)을 하잖아요. 나중에 그 다짐 때문에 싸우게 되고. 나이 어린(?) 시인이 너무 어른스런 충고는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