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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Oct 25. 2024

목우씨의 긁적긁적(74)

제74화 : 귀신 셋을 등에 업고 살다

    * 귀신 셋을 등에 업고 살다 *          



  시체(屍體)우리말로 '주검'이라 한다. 수업 중에 ‘주검’이란 말 나오면 꼭 한 명은 질문한다. 왜 주검이냐고? '주금(죽음)'이면 이해되는데.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하다. 나도 국어교사가 아니었더라면 ‘주검’이 잘못된 표기인 줄 알고 있을 테니.          



  <내가 업은 첫 번째 ‘주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나는 드디어 골목대장이 되었다. 힘이 세서 된 게 아니라 나보다 나이 많거나, 나랑 나이 비슷해도 좀 노는 애들은 동네 꼬맹이들 노는 데 끼어들지 않았으니 가장 나이 많아 얻은 자리다.      

  대장이 되면 몇 가지 처리해야 한다. 여름이면 낮에 뒷산 공동묘지에 올라가 놀다가 – 당시 묘지 주변엔 먹을 게 많이 나 놀이터나 마찬가지 – 꼬마들을 데리고 내려온다. 그런 뒤 한밤중에 두 명씩 짝지어 내가 몰래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오게 한다. 나도 작년까지 그 일 했으니 이제 시키는 나이가 된 셈. 일종의 통과의례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데리고 ‘송해’로 가 헤엄치며 놀다 오는 일. 송해는 성지곡수원지(현 부산 초읍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에 있던 작은 못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큰 저수지와 작은 저수지는 아주 깊고 넓어 들어갈 수 없고, 작은 저수지 아래 꼬맹이들 놀 만한 못이 있었으니 거기가 송해다.      


(성지곡수원지)


  그날도 신나게 놀다가 돌아올 무렵 한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허나 걱정하지 않았다. 헤엄을 가장 잘 쳤으니까. 아무리 불러도 없어 먼저 집으로 갔나 하고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났다. 이는 대장을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      


  그러고 집에 가려는데 한 애가 물속을 보면서 더듬거리며, “어... 어... 어... 저... 기...” 하는 게 아닌가. 뭐에 놀라 저러나 싶어 보니 세상에! 웬 아이 하나가 보였다. 순간 깜짝 놀라 뛰어들었다. 아무리 어렸어도 이 시간까지 나오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난 게 틀림없으니.      

  잠수해 들어가니 물속까지 뻗은 뿌리에 그 애의 발이 감겨 있었다. 아무리 헤엄 잘 쳐도 거기에 발이 걸렸으니... 아이 둘의 도움으로 겨우 발을 빼내 물가로 옮겼지만 이미 숨이 멎은 상태. 지금 같으면 119나 전화로 연락하련만 60년 다 된 시절이니까.      


  연락할 곳도 연락할 방법도 몰라 그저 아이를 업고 집까지 걸어왔다. 틀림없이 엄청나게 무거웠을 텐데 그 무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동네 도착하자 사람들이 다 나와 보고선 혀를 찼고... 나는 걔 엄마나 아버지께 맞을 각오를 했다.  


(1960년대 아이들 노는 모습)

    

  헌데 걔 엄마가 뜻밖의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를 네댓 번 했을까, 그걸로 끝. 그 뒤 사람들은 흩어졌고 나도 집으로 왔고... 그날 밤 걔 아버지 아닌 우리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고.


  그 뒤 걔 아버지 어머니에게 한 번도 손찌검은 물론 꾸지람도 들은 일 없이 지나갔고 어린 날의 평범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내가 업은 두 번째 주검>          



  대학 2학년 때 내가 속한 서클 -지금의 '동아리' -에서 팔공산으로 떠났다. 청주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서클 회원들과 만남이 목적. 신통하게도 부산과 청주가 도시 크기는 차이가 나지만 당시 대학(교) 숫자는 같았고, 7개 대학 학생이 함께 하는 연합서클에 내가 속했다.      

  서클 경험 있는 이라면 알겠지만 2학년 1학기까지 열심히 하다가 2학기가 되면 대부분 빠진다. 왜냐면 남학생들은 군 입대 시기이니까. 그해 나도 나가지 않았는데 하필 청주에서 고참(?) 둘이 참석한다기에 우리도 구색 갖추게 둘이 끼어들게 되었다. 나와 같은 대학 동기와 함께.      


(1970년대 대학 캠퍼스)


  부산과 청주 중간 지점인 대구 팔공산에서 모임 끝내고 기차를 타고 내려올 때였다. 그때는 기차 안에서 노래 부르고 술 마시는 일은 다반사. 나는 다음 주 있을 중간고사 생각해 술을 자제했는데 동기가 술을 마구 들이켰다. 이상하다 싶어 알아보니 평소 좋아하던 서클 1학년 여학생이 헤어지자고 했다나.      

  기차가 밀양 가까이 다가갈 때 동기는 바람 쐰다고 나갔고, 나는 졸음을 못 이겨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고...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서 웅성웅성 하더니, 외마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사람이 떨어졌다!”는 말과 함께.

     

  화들짝 놀라 일어나 살피니 동기가 보이지 않았다. 황급하게 달려가 소리 지른 사람을 찾았는데 누군가 철교 아래로 떨어졌다고만 하고. 인원 점검해 보니 분명히 없다, 그 동기가. 다시 한번 더 확인해도 없다. 물어봐도 본 사람이 없다. 방법은 하나.      

  기관실로 찾아가 잠시 멈춰 달라고 했지만 밀양역이 얼마 안 남았으니 멈출 수 없다나.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역에 닿자마자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철교 아래로 내려갔다. 철교 아래는 원래 물이 흘렀으나 그해 따라 가뭄이 심하여 물 흐르는 공간은 온통 돌밭으로 바뀌었고.


(밀양철교)


  동기를 찾았을 땐 아직 숨이 멎지 않았다. 재빨리 업고 다시 택시를 타고 근처 의원을 찾았다. 헌데 선생님 말씀이,

  “여기선 안 됩니다. 빨리 부산 봉생병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거기 가면 살 수 있을지도...”

  일행 한 명과 다시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앉아 내 무릎 위엔 동기의 머리를, 다리는 일행 무릎 위에 눕혔다. ‘양산’을 지났을까,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목도 가누지 못하는 게 아닌가. 결국 봉생병원에야 도착했지만 이미 끝. 그렇게 또 한 사람의 주검을 업은 일을 경험했으니...      


  경찰과 함께 사고 경위를 조사하며 드러난 사실은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 당시 철교에는 공사하는 인부를 위해 나무로 피신대를 만들어놓았다.

  동기는 마음이 불편해 바람 쐬려 나가 한 발과 한 손으로 열차에 의지한 채 다른 한 발과 한 팔은 밖으로 내밀었던가 보다. 기차 달리는 속도에 팔이 나무 피신대의 기둥에 부딪히면서 그 충격으로 한 손마저 놓았고, 결국 다리 아래로 떨어졌고...          


(봉생병원)



   <내가 업은 세 번째 ‘주검’>          



  외삼촌은 아버지보다 나이 어렸지만 손위 처남이었다. 왜냐면 울엄마의 큰오빠였으니까.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에 살다 부산에 일찍 정착한 우리를 믿고 옮겨와 5분 거리에 집을 구했다.      

  아버지와 외삼촌은 사이가 좋았으나 술만 취하면 맨날 싸웠다. 시비는 언제나 외삼촌 쪽. 내용도 똑같았다.

  “정서방, 자네 내 동생한테 잘해줘야 한다.”

  그러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잘해주라고?”

  “어, 말하는 것 봐라. 내가 정서방 손위잖아.”

  “손위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다섯 살 위잖아.”      


  그때부터 티격태격. 울엄마가 중간에 나서 외삼촌 모시고 집으로 가야 끝났다. 그날도 그랬다. 아버지랑 술을 마신 뒤 또 싸웠고... 다만 그날은 아버지가 볼일 있어 일찍 집 떠나는 바람에 중간 휴전.      

  외삼촌은 술 더 마시고 싶다 하자 울엄마가,

  “오빠, 안 돼. 이미 많이 마셨어.”

  그래도 술 취한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있던가. 기어코 술 더 마시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데 갑자기 주저앉으며,

  “아이구 머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침 내가 홀로 곁에 있었던 까닭은 울엄마가 찬거리 산다고 시장에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까지 모셔드려야 할 임무로.




  잠시 누워계시더니 일어서길래 나도 따라 일어섰다. 그런데 또 한 번 “아이구 머리야!” 하며 다시 주저앉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 외삼촌이 술 취해 머리가 아픈, 즉 숙취인 줄 알았다. 그래서 댁에 모셔드리면 되겠다 싶어 소리 내 외삼촌을 불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신발만 신으면 부축해 가려 했다. 허나 정신을 못 차리기에 다른 날보다 많이 취했나 싶어 업었다. 집 앞을 나섰을까, 갑자기 싸함이 느껴졌다. 다리가 뻐덩뻐덩했기 때문에. 순간 아차! 했다. 이미 두 번이나 주검을 업어 본 비싼(?) 경험 덕으로.          



  <맺으며>          



  꼬마애가 하늘로 갔는데도 ‘아이구!’ 세 번으로 끝난 그 집 엄마의 행동이 오랫동안 이해 안 되다가 커서야 막내누님에게 들었다. 당시에 그 집 식구는 모두 열 명. 지독히도 가난한 바람에 굶주릴 때가 더 많았다고 한다.

  걔 엄마는 자식 잃은 게 슬프지만 누가 떠밀어 죽은 것도 아니니 남은 자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으리란 누님의 말.          




  대학 동기도 생각하면 참 아프다. 사건 조사가 끝날 때까지 경찰서에 드나들었으니까 동기 엄마와도 자주 만나 얘기 나누게 되었다. 그 집에선 누나가 다섯인데 막내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애지중지했으랴.      

  졸업할 때까지 그 동기 집에 들렀다. 가면 불편했지만 너라도 봐야 아들 생각이 덜 난다고 자꾸 불러서. 가지 않으려 했으나 거절 못했고. 졸업한 뒤엔 찾아가진 못하고 몇 번 전화로 안부 물었는데, 이 년짼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 때문에 빨리 가심인가...      


  앞의 두 사람의 죽음보다 외삼촌은 좀 낫다. 살 만큼 살았으니까. (우리 아버지 말이다. 당시에 65세까지 살았으면 그 소리 들을 만하다나) 그래도 '좀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소리를 술만 취하면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울엄마는 술친구 잃어서 하는 소리라 했고.          


  내 등에는 세 사람의 주검이 업혔다. 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명인가, 아직도 가끔 그 주검들을 느낀다. 삶의 무게와 함께 혼(귀신)의 무게도. 어떤 땐 떨치고 싶은데 이젠 담담하다. 세 명의 귀신이 수호천사가 되어 나를 지켜주리라 믿으며.


  *. 둘째 사진은 ([우리문화신문] 2017년 4월 28일)에서, 셋째는 ([경향신문] 2013년 12월 27일)에서, 넷째는 ([울산신문] 2020년 8월 11일)에서 퍼왔으며, 나머지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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