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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Oct 24.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09)

제209편 : 강연호 시인의 '건강한 슬픔'

@. 오늘은 강연호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건강한 슬픔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 [기억의 못갖춘마디](2012년)


  #. 강연호 시인(1962년생) : 대전 출신으로 1991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현재 원광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나이가 드니까 변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눈물입니다. 전에는 거의 안 울었는데 요즘은 조금만 감동받아도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이십 대 후반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워낙 울지 않아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 들리더란 말을 누님에게 전해 들을 정도로 참 눈물 없었는데...

  시의 제목이 의미를 갖습니다. 보통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고 하지 않고 '기쁨에도 건강이 있다’고 합니다. 슬픔과 건강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이를 수사법으로는 역설법이라 하며 '모순형용'이란 말이 덧붙습니다. 즉 앞뒤가 모순되는 표현이란 뜻이지요.


  오늘 시에선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하는 시구가 전체를 관통합니다. 여기서 전제는 모든 슬픔이 아니라 특정한 슬픔에 한해서. 어쩌면 삶의 숱한 고비를 넘긴 분이라면 슬픔과 건강이라는 모순된 시어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요.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보통 저쪽 안부 물을 틈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이성이라면 둘 사이는 매우 가까워야 합니다. 헌데 뒤에 이어지는 시구로 보아 아닙니다. 그녀가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남자는 내가 아니었고, 내가 원했던 여자도 그녀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여사친 가운데 한 사람? 더욱 두 사람 사이엔 오랫동안 연락 없었고,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서 서로의 삶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두 사람 사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시행입니다. 가까운 사이였다면 여자가 오래 울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적어도 그녀의 울음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갖추었을 텐데. 나뭇가지에 달린 잎과 잎은 참 친밀해 보이지만 그 사이로 세월이란 바람이 흘러가듯이,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세월이 흘러간다는 표현에 잠깐 멈춥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뜬금없이 그녀가 나보다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울고 화자인 나는 침묵했건만. 왜 건강하다 했을까요? 바로 그녀는 그리 친하지도 않은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럼 나는?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슬퍼도 슬픔을 감출 줄은 알지만 드러낼 줄 모르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린 눈물 보임에 참 인색합니다. 특히 남자는 주입식 교육을 받았지요. 태어날 때,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나라 잃었을 때만 울어야 한다고.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립니다. 다만 아무도 보는 사람, 듣는 사람 없는 곳에서 혼자 깊숙하게 웁니다. 저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울지 않았으나, 상 치른 다음 주 울산에서 부산 집에 내려와 무심코 방문을 열며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확인하는 그 순간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부엌 바닥에 퍼질고 앉아 소리 내 울었습니다. 그 소리가 퍼져나가 길 가던 동네 사람들이 발 멈출 정도였다 하니.


  아플 땐 아프다 하고, 슬플 땐 슬프다 하고, 힘들 땐 힘들다고 해야 하는데 우린 얼마나 진중함을 강요당한 채 살았는지. 혹 제가 한밤중 전화해 글벗이 받는 순간 펑펑 울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길. 그게 건강한 울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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