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현숙 시인(1959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9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올 2월에 제14회 ‘김구용 시문학상’ 받았으며, 현재 한서대와 고려대에 출강.
(소위 '땡땡이 빤스')
<함께 나누기>
예전에 학교 근무하던 중 평소 지각 않던 분이 늦게 와 사연을 물으니 “아, 아침에 제 차가 갑자기 빵구 나 있지 않겠어요.”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슬며시 웃고 말았는데 곁에 있던 다른 선생님이 “아니 김 선생님, 빵구가 뭡니까, 펑크라 해야지.” 하고 웃는 바람에 난장판이 됐고.
오늘 시에 나온 ‘팬티와 빤스’, 그리고 일화 속의 ‘펑크와 빵구’ 둘 다 같은 비교열에 듭니다. ‘팬티와 펑크’는 원래 영어 발음을 우리말 형태로 적은 거라면, ‘빤스와 빵구’는 일본식 영어를 우리말로 적은 낱말입니다.
헌데 가만 들어보면 앞말과 뒷말은 조금 차이가 납니다. 왠지 원래 영어 발음이 좀 고급스러운 말 같고 일본식 영어 발음은 촌티 나는 듯한. 그래선지 팬티는 여자가 갖춰 입는 섹시한 속옷일 것 같다면, 빤쓰는 남자가 아무렇게나 입는 값싼 속옷 같다고 할까요.
여자 아닌 같은 남자가 입는다 해도 삼각은 팬티라 해야 어울릴 것 같고, 사각은 빤쓰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삼십 대가 입는다면 팬티라 해야 어울릴 것 같고, 오십 대 이상이 입는다면 빤쓰라 해야 할 것 같고...
오늘 시에서도 같은 여자가 입지만 빤스와 팬티는 다르다고 합니다. 제가 나오는 속옷 용어를 몰라 정확히 구분하진 못하겠습니다만, 고급스러운 속옷엔 팬티, 그냥 편히 아무렇게나 입는 속옷은 빤스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외출 준비를 할 때는 뱀이 허물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했으니 빤스는 집에서 편하게 걸쳐 입는 속옷입니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면서도 편안한 속옷이 땡땡이 물무늬 빤스라 합니다. (* 땡땡이는 우리말 아닌 일본어로 '물방울'이란 뜻을 지님)
밖에 나갈 때는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습니다. 레이스팬티가 훨씬 고급스러운 속옷인 듯.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듯이 우아하게 예쁜 레이스가 달려 기분이 좋아지고 살도 나풀댑니다.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이 부분에서 빵 터졌습니다. 갑작스럽게 다쳐 바지를 벗고 속옷을 보여야 할 처지가 되면 땡땡이 빤스 입은 걸 들키게 돼 창피스럽습니다. 그러니 외출할 때는 빤스 아닌 라펠라 팬티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라펠라’는 아마도 고급 속옷 브랜드 이름인 듯.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이왕 남들에게 보인다면 품위 있게 보여주고 싶다는 외침, 이해가 갑니다만 빤스 아닌 팬티 입으면 품위가 있는지... 아 당장 오늘이라도 아내에게 말해 헐렁한 사각빤스 대신 고급 브랜드인 팬티 사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혹 교통사고 나면 무슨 창피입니까? 게다가 의사나 간호사가 제자라면...
<뱀의 발(蛇足)>
누드 – 나체 – 알몸
밀크 – 우유 – 소젖
'서양어 - 한자어 - 우리말'의 비교열에서 발가벗고 그린 그림을 ‘누드화’, ‘나체화’, ‘알몸화’로 바꿔 봅니다. 글벗님들은 어느 용어가 더 예술적으로 (우아하게, 품위 있게) 느껴지십니까? 아마도 알몸화라 하는 순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 겁니다.
마찬가지로 카페 가서 ‘밀크 한 잔 주세요.’, ‘우유 한 잔 주세요.’, ‘소젖 한 잔 주세요.’라고 한 번 해보세요. 만약 ‘소젖 한 잔 주세요.’ 하면 쫓겨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불한당으로 몰려 낭패 볼지도.
‘팬티 – 내의(內衣) – 속속곳’의 비교열도 비슷합니다. ‘레이스 팬티 사다 주겠니?’ 대신 ‘구멍무늬 속속곳 사다 주겠니?’ 이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으면 더 이상할 겁니다. 이미 외래어가 우리말 누른 장면입니다. 팬티는 은연중 고상함을 머금은 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팬티가 최상은 아닙니다. 그 위에 '란제리'가 있으니까요. 이걸 보면 영어보다 프랑스어가 더 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기야 패션에 있어서만 프랑스가 으뜸이라 그런지 몰라도. 주방장이라 부르면 무식하단 소리를 듣고 셰프라 불러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보험 아주머니'라 부르기보다 '라이프 플래너'라 불러줘야 예의 갖춘 호칭이 되는 시대입니다. 우리말의 위상은 외국어(특히 서양어)에 고상함을 부여하면 할수록 더 떨어지는 희한한 세상이 돼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