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할미꽃이 이른 봄에 피고, 해바라기는 한여름에 피어 둘이 만날 일은 없습니다만 아주 옛날에는 두 꽃 모두 뜨거운 여름에 피는 꽃이었답니다. 그리고 현재는 해바라기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할미꽃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지만 그때는 정 반대였어요.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고 할미꽃이 고개를 드는.
그런데 두 꽃이 지금처럼 계절이 다르게 피어 만나지 못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담겼답니다.
키가 큰 해바라기와 작은 할미꽃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해바라기가 할미꽃의 자줏빛 고운 얼굴에 반했다면, 할미꽃은 해바라기의 환히 웃는 노란 얼굴에 마음을 빼앗겼지요. 둘은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누가 보든,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서로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꽃마을에서도 알아주는 한 쌍이 되었습니다.
해바라기가 키 작은 할미꽃을 생각하여 고개를 숙이며 사랑의 말을 속삭여주면, 할미꽃은 고개를 들고 귀를 쫑긋 세워 그 말을 들었고요. 할미꽃이 바람결에 사랑의 고갯짓을 하느라 꽃봉오리를 흔들면 해바라기도 따라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지요.
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곁의 꽃들이 다 시기를 했습니다만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만 하늘의 태양이 질투를 한 거지요. 사실 태양은 은근히 해바라기를 좋아하고 있었거든요.
자기처럼 둥근 얼굴에다 쭉 뻗은 늘씬한 다리에 절로 반했지만, 태양은 자존심이 강하여 해바라기가 먼저 말을 걸어주길 바랐지 뭐예요. 그러는 중에 그만 해바라기가 자기보다 훨씬 못하다고 여기던 할미꽃을 사랑하는 걸 보았고요...
사랑을 빼앗긴 데다 자존심도 무너진 태양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러잖아도 불같은 성격에 자기에게 상처 입힌 할미꽃이 그리도 미울 수밖에요. 그래서 태양은 자신의 몸을 뜨겁게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 뜨거운 불길을 다른 꽃들은 다 놔두고 오직 할미꽃에만 집중적으로 비추었지요. 한동안 뜨거운 불길을 피하려고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건만 결국 할미꽃은 견디다 견디다 못해 그만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할미꽃이 눈이 멀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해바라기는 한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맛보았어요. 하지만 자기보다 더 절망적이 되었을 할미꽃을 생각하며 자신의 사랑은 한 점 변함없다고 진솔한 마음을 담아 말합니다.
그러나 할미꽃은 그 사랑에 대한 진실이 흔들림을 느꼈어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외모도, 체구도 도무지 비교가 안 돼 조마조마했거든요. 그래도 사랑으로 모두 다 감쌀 수 있다고 여겼건만 이제는 아니지요. 자신은 이제 그리운 이의 얼굴조차 바라볼 수 없는 눈먼 꽃일 뿐.
그래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참함에 부끄러워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요. 뿐만 아니라 해바라기가 눈이 먼 자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늘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괴로웠어요.
이제 시간이 흘러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까지 받게 되면 정말 살 수 없으리란 마음에 고민하던 할미꽃은 신을 찾아갑니다. 어렵사리 신(神)을 만난 할미꽃은 자신을 해바라기가 볼 수 없는, 그와 마주치지 않는 계절로 보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도움은 태양의 횡포를 바로잡는 일이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어떻게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 할 수 있는 거라곤 할미꽃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뿐. 그래서 해바라기가 피기 전에 피었다가 지도록 봄으로 옮겨줍니다.
사랑하던 할미꽃의 눈이 멀어지고 그로 하여 자기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됐다는 사실을 안 해바라기는 분노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태양을 응징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 만한 힘을 그는 가지지 못했지요. 해바라기가 할 수 있는 건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 일뿐.
그날부터 해바라기는 날마다 태양이 뜨면 그의 얼굴을 노려봅니다. 그랬다가 태양이 지면 그때사 고개를 수그립니다. 혹시나 하여 한 번씩 아래를 훑어보지만 사랑하던 할미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꽃마을에 떠도는 소문대로 봄으로 옮겨갔나 봅니다.
오늘도 해바라기는 태양이 뜨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노려봅니다. 목이 아프고, 얼굴이 뜨겁지만 태양에 대한 증오는 아직까지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