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담쟁이의 꿈


너무 높아 바람조차 쉬어 넘는다 하여 바람재라 이름 붙여진 고개 아래 동네 이름은 재마을입니다. 재마을은 바람 없는 날보다 바람 부는 날이 더 많고 아주 세차게 불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집마다 돌담이 집을 두르고 있습니다.


돌담 아래 양지쪽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담쟁이 가족이 모여 삽니다. 그리고 거기 아기 담쟁이도 있습니다. 모든 담쟁이가 그렇듯이 아기 담쟁이 역시 담을 타고 오르는 게 늘 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아기 담쟁이는 돌담 위로 손을 뻗습니다. 내미는 손이 짧아 뻗어도 어른 담쟁이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도 아기 담쟁이는 손을 뻗습니다. 그러나 위 돌담까지는 아직 한참 멉니다. 그래도 아기 담쟁이는 또 뻗습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엄마가 한 마디 합니다.

“얘야, 너는 아직 어리니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엄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아기 담쟁이는 다시 손을 뻗습니다. 아직도 저만큼 모자랍니다.


여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기 담쟁이는 조금 더 자랐습니다. 손을 내밀면 전보다 더 멀리 닿습니다만 아빠 엄마에게는 아직도 훨씬 못 미칩니다. 해도 아기 담쟁이는 팔을 뻗습니다. 뻗고 또 뻗다 보니 팔 길이가 조금 길어진 듯한 느낌입니다.

가을입니다. 담쟁이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가만 세어보니 돌담 세 개를 올라섰습니다. 짧은 손 내밂이 더하고 더하여 그리 된 모양입니다. 허나 아빠 엄마까지 닿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습니다.


해서 이제 담쟁이는 작은 꿈을 가집니다. 아빠 엄마에까지 올해 안에 이르겠다는 꿈 말입니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조그마한 게 감히 …’ 하며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상관없습니다. 그건 꿈이니까요. 꿈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다 허락된 소중한 거니까요.

다시 봄입니다. 담쟁이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돌담 두 개만 더 올라서면 바로 아빠 엄마 뒤에 붙을 수 있으니까요. 정말로 여름이 가기 전에 아빠 엄마의 바로 뒤에 붙었습니다. 이제 꿈이 바로 앞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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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자 담쟁이에게 어린 티는 완전히 가시고 청년의 티가 납니다. 누가 봐도 씩씩한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팔의 길이가 길어지고 속도도 충분히 낼만큼 체력도 강합니다. 덕분에 중순 즈음 아빠 엄마와 나란히 섰습니다.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 당당히 자신의 힘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직전에 담 꼭대기에 가장 먼저 이르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습니다.

새로 봄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젊은 담쟁이는 제법 살이 통통하게 불었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뒤이어 담 위에 올랐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으니 옆으로 옮겨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빠 엄마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젊은 담쟁이는 그리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빠 엄마처럼 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아직 힘이 넘칩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하여 포기하기에는 젊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담쟁이의 눈에 두어 자쯤 떨어진 곳에 있는 깨감나무(표준어로 ‘고욤나무’)가 들어왔습니다. 깨감나무, 돌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아 있습니다. 갑자기 젊은 담쟁이의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새로운 꿈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빠 엄마는 무모하다고 말립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거기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냥 우리처럼 옆으로 나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새로 얻은 꿈의 유혹이 더 큽니다.

젊은 담쟁이는 손을 내밉니다.

아빠 엄마 말대로입니다. 한참 미치지 않습니다. 아니 턱도 없습니다. 다시 내밉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빠 엄마는 거듭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여름 내내 내밀었습니다. 가을이 왔지만 여전히 깨감나무에게는 못 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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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봄이 되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이내 새로 올라오는 순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할 듯합니다. 그걸 보니 이제 중년에 이른 담쟁이는 더욱 포기할 수 없습니다. 꿈을 이루기 전에 죽을 순 없습니다. 다시 손을 내밉니다. 여전히 짧습니다. 그러나 자꾸 내밀다 보니 전보다 훨씬 팔이 길어진 걸 느낍니다.

봄여름 내내 손을 내밀고 또 내밀었습니다. 여전히 짧지만 가능성이 보입니다. 바람이 불 때면 저쪽 깨감나무에 살짝 닿기 때문이지요. 이제 조금만 더 내밀면 됩니다. 하지만 이번 가을이 고빕니다. 이번에도 되지 않으면 다시 봄이 오면 도전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빠 엄마처럼 기력이 쇠잔해지면 포기하고 싶지 않아도 포기해야 하니까요.


초가을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세찬 바람이 붑니다. 아주 세찬, 폭풍을 넘어 태풍에 가까운 바람이 붑니다. 다들 몸을 움츠립니다. 그러나 담쟁이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돌담에 딱 붙어 있으면 그만이니까요.

바람이 가라앉고 난 뒤 변화가 생겼습니다. 깨감나무의 묵은 가지 하나가 부러지면서 돌담에 걸터앉는 바람에 둘이 이어졌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중년의 담쟁이는 깨감나무로 쉬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뿌리를 박았습니다. 이제는 봄이 되어 올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다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면서 이젠 늙어버린 담쟁이는 깨감나무의 꼭대기에 섰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습니다. 담쟁이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대견스럽습니다. 또 꿈을 이루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위로 치켜든 눈에 푸른 하늘이 들어옵니다. 푸른 하늘, 갑자기 담쟁이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손을 뻗어 푸른 하늘과 땅을 잇는 동아줄을 만드는 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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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다시 또 찾아왔건만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제 담쟁이도 할아버지 소리를 듣습니다. 손주의 재롱이나 보며 살면 그만입니다. 그리 살면 편안하겠지요. 그러나 담쟁이의 가슴에는 푸른 하늘에 동아줄을 놓고 싶은 꿈이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들고 있기조차 힘든 손을 허공에 내젓습니다. 그냥 허공에 던진 손짓 하나로 끝납니다. 다시 손을 내밉니다. 마찬가집니다. 자식들도 이웃들도 다들 노망했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쉬임 없이 내밉니다. 그래도 허공만 잡습니다.


또다시 가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생겼습니다. 주인이 깨감나무를 베러 온 것이지요. 원래 깨감나무는 빨리 자라는 성질을 이용하여 단감나무 묘목과 접붙이려고 키운 것인데 감농사를 포기했기에 쓸모없는 깨감나무를 놔둘 필요가 없었지요.

깨감나무가 잘리던 날 담쟁이도 잘렸고, 그의 꿈도 잘렸습니다. 그러나 담쟁이의 눈은 웃고 있습니다. 노망했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그의 꿈은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넘어지면서 쓰러진 곳이 바로 전봇대 옆입니다. 열흘 정도만 여기서 숨 쉬고 있으면 바로 아래 뿌리를 내릴 수 있으니까요. 전봇대는 깨감나무처럼 잘릴 염려가 없으니 자식 중의 어느 하나는 푸른 하늘을 향한 꿈을 꾸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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