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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 내리는 비
Nov 07.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17)
제217편 : 김신용 시인의 '열무꽃'
@. 오늘은 김신용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열무꽃
김신용
*‘만일 열무꽃을 보았다면 처녀 불알도 보았으리’라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라는, 유월 아침이다
밭에 나가니, 하얀 열무꽃이
흰 꽃잎의 테두리에 엷은 보랏빛이 번져 있는, 조그만
열무꽃이, 섬광처럼 피어 있다
열무는 ‘어린 무’여서 꽃이 필 수 없다는, 열무
만일 꽃이 피었다면 손에 장을 지질 일이라는, 열무꽃
그 열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손가락만 한, 어린 무처럼 생긴 빈약한 뿌리를 매달고
저리도 애잔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열무라는 채소의 종(種)이 따로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단순히, 어린 무라고 판단한 사전적 지식이 놓친 열무꽃을 보는 것은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열무는 자신의 부드러움을 지우고
줄기에 질긴 심을 채우는, 열무의 생을 보는 것만큼이나 안쓰러워
생각느니,
우리는 어린 열무의 잎과 줄기를 먹기 위해, 열무가 꽃을 피우기 전에 수확을 해야 하지만
열무의 바램은, 자신의 부드러운 줄기에 질긴 심을 채워
꽃을 얻어
씨를 영글게 하는 것이거니
보라,
열무라는 어감 속에 짙게 배어 있는 초록의 열망을, 그 강한 모태(母胎)를—.
지금 밭에는, 장터에서 구해온 씨앗으로 심은 열무가, 꼿꼿이 꽃대를 세우고
조그마한, 찰나의 섬광 같은 꽃을 하얗게 피우고 있다
- [진흙 쿠기를 굽는 시간](2023년)
*. [시인수첩] 창간호에 발표된 「詩詩非非」에서 인용.
#. 김신용 시인(1945년생) : 부산 출신인데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으로 전문적인 창작 교육을 받지 못함.
14세 때부터 떠돌이생활, 지게꾼 등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다 1988년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펴내 등단
이 시인에 대한 평입니다.
"김신용의 시는 동시대의 노동시들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성취한 예로 봐도 된다"
<함께 나누기>
꾸지뽕이란 나무(열매)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이름만 들으면 당연히 뽕나무 열매(오디)랑 비슷하겠거니 합니다.
물론 꾸지뽕나무도 뽕나무과에 속하니 전혀 다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사실 다른 점이 더 많습니다.
일단 열매 수확 시기에서 크게 차이 납니다. 오디는 6월이요 10월이니 여름과일 가을과일로 확실히 구분됩니다.
또 다른 차이로는 꾸지뽕 가지와 줄기에 가시가 돋았으나 일반 뽕나무에는 가시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시의 글감 열무도 여린 무(또는 어린 무)란 말에서 왔으니 무와 같은 종자인 줄 아나 지금 우리가 먹는 열무는 개량된 채소로 무와 거리가 멉니다.
(일반) 무를 개량하면서 원래 뿌리를 주로 먹게 돼 있는 무를, 잎을 주로 먹게 만든 채소가 바로 열무입니다.
그런데 어원만을 두고 본다면 열무는 어린 무에서 왔으니까 어린 무는 당연히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허면 열무꽃이 없느냐? 아닙니다. 개량되면서 본성까지 다 바꾼 바람에 열무에게도 열무꽃이 핍니다. 그래야 씨를 받고 또 심을 수 있으니까요.
시로 들어갑니다.
“‘만일 열무꽃을 보았다면 처녀 불알도 보았으리’라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라는, 유월 아침이다”
아래 행으로 가면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아는 게 많다고 자랑하는 식자(識字) 가운데,
‘열무라는 채소의 종(種)이 따로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단순히 어린 무라고 판단한 사전적 지식이 놓친 열무꽃’을 시골 살면 가끔 봅니다.
“그 열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손가락만 한, 어린 무처럼 생긴 빈약한 뿌리를 매달고 / 저리도 애잔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열무 자체가 작은 무 형태라 잎이 빈약한데 거기에 핀 꽃 역시 애잔함을 자아낼 만큼 허약해 보입니다.
사실 열무는 약한 바람이 불어도 잘 기웁니다. 허지만 갈대처럼 이내 다시 일어섭니다. 열무꽃 역시 작지만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린 열무의 잎과 줄기를 먹기 위해, 열무가 꽃을 피우기 전에 수확을 해야 하지만”
열무가 꽃을 피우면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열무꽃 피기 전에 잎과 줄기를 잘라먹습니다.
그럼 열무의 속마음은 어떨까요? 당연히 자신의 부드러운 줄기에 질긴 심을 채워 꽃을 얻어 씨를 영글게 하고 싶겠지요. 생명 있는 존재의 본능이니까요.
“보라, / 열무라는 어감 속에 짙게 배어 있는 초록의 열망을, 그 강한 모태(母胎)를—”
열무란 말을 내뱉지 말고 잠시 입에 머금고 있으면 열무의 초록빛 잎사귀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 초록의 열망 뒤엔 열무 역시 그 초록의 열망을 이어 줄 후손을 만들 바람을 가집니다. 다만 그 희망을 사람들이 자를 뿐.
씨 없는 수박이 나왔을 때 많은 분이 환호를 내질렀지요. 먹을 때마다 씨를 뱉어내야 하는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요.
허나 생명의 순행성장(씨-싹-꽃-열매-씨)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몹쓸 짓을 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시인에게 열무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무꽃이 더 반가운 지도. 비록 열무를 먹지 못하게 될지라도.
가끔 시인 가운데, 아니 예술가 가운데는 그런 일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으니까요.
*. 첫째 사진은 [살림공동체](2019년 6월 16일)에서, 둘째는 [김달진문학관] (2006년 6월 2일)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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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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