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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Nov 20.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24)

제224편 : 송유미 시인의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 오늘은 송유미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송유미


  산더미같이 쌓여진 그릇을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선다

  밥공기들을 하나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다가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먹기 위해 쓰이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 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럽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누룽지가 붙어서 좀처럼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찻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 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뼛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 번 비우지 못해

  청정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 묻은 정(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제 가슴 하나 헹구지도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저녁을 종종걸음 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 것이다

  - [당나귀와 베토벤](2011년)


  #. 송유미 시인(1955~2023년) : 서울 출신으로 1989년 [심상], 199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시조),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와 [경향신문] 신춘문예(시)를 통해 등단. 남들은 한 번도 등단하기 힘든 과정을 네 번이나 거쳤으니 문재(文才)는 인정받을 듯.

  계간 [시와 사상] 편집장으로 일하며 시를 쓰다가, 2021년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여러 장애를 겪다가 작년에 세상을 떠남.




  <함께 나누기>


  이 시는 소설가 양귀자 님의 [천년의 사랑]이란 책에 실려 여러 사람의 눈길을 받은 시입니다. 양귀자 님은 거기서 "단지 설거지만 하고 있을 뿐인데, 시의 언어들이라고 해야 냄비거나 '퐁퐁'이거나 솥이 거의 전부인데, 난해한 반전 한번 주자 않았는데, 그럼에도 이 시를 읽는 순간 그냥 물처럼 스며들었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는 제법 길지만 내용이 어렵지 않아 이해하는데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한 시행 한 시행 분석하기보다 전체적으로 파악합니다.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 더럽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붙으면 /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마음 한 번 비우지 못해 / 청정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 때 묻은 정(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 제 가슴 하나 헹구지도 못하면서"  


  손에 잡히는 몇몇 시행만 봐도 어지간한 시 한 편 양이 됩니다. 즉 읽기 참 좋은 시란 말이지요. 그리고 좋은 시인은 자기의 내면적 상처를 반성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한다면 이 시도 거기 포함하겠지요.

  요즘 저도 아침저녁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할 때마다 어떡하면 빨리 끝낼까 궁리할 뿐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칩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돈 많은 이도, 권력 쥔 이도, 여인에게 인기 있는 이도 아닌, 내가 보지 못한 점을 보는 사람입니다.


  저는 설거지를 하면서 그릇에 묻었다가 씻겨 나오는 땟국물을 저의 잘못으로 여긴 적 없건만 이 시를 읽는 순간 부끄러움이 치솟았습니다. 특히 "미움이 마음에 눌어붙으면 /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란 시행, 허니까 저는 하도 오랫동안 달라붙어 눌어붙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상태.

  다만 시인은 제게 붙잡을 화두 하나 남겨주셨으니...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구두를 닦으면 광이 나고, 오래된 마루에 아주까리 열매 놓고 문지르면 광이 나듯이 내 마음도 광나게 할 길은 있을진저.


  우선 할 일은 남 눈의 작은 티는 잘 보면서 내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했기에, 이제 잠시 멈춰 저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반짝이게 닦을 시간임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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