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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25)

@. 오늘은 김필영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삭는다는 것
김필영

잘 삭은 술은 사랑받는다
포도가 잘 삭아야 좋은 술이 된다
견디기 힘든 고난도 따뜻이 위로하면
아픔이 삭는다
삭은 눈물이 강이 될 때
물 흐르듯 슬픔이 씻겨 일어설 수 있다
항아리에서 잘 삭은 김치는 밥도둑이다
잘 삭은 홍어를 가운데 두고
응어리진 마음도 잘 삭히면
서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삭는다는 것
상처받은 사람만이 삭을 줄 안다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잘 삭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쓴잔을 앞에 두고
눈물 흘려본 사람만이
잘 삭은 술을 마실 수 있다
- [시문학](2011년 1월호)

#. 김필영 시인(1954년생) : 전남 영광 출신으로 2009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계간 [스토리문학]과 [시산맥] 편집위원을 역임



<함께 나누기>

제가 1년에 200여 명 시인의 시를 배달하는데 그 가운데 160명 정도는 해마다 배달하며, 40명쯤 바꿔서 올립니다. 오늘 소개하는 김필영 시인은 처음 대하는 시인이라 잘 모릅니다. 우연히 시를 검색하다 만났는데 일단 눈에 들어와 배달합니다.

우선 ‘삭다’를 사전에서 찾아봅니다.

1. 물건이 오래돼 본바탕이 변하여 썩은 것처럼 되다.
‘삭은 나무토막’이라든지 '저 사람 팍 삭았네' 할 때 씁니다.
2. 걸쭉하고 빡빡하던 것이 묽어지다.
‘죽이 삭다’처럼 처음에 뻑뻑하다가 먹다 보니 침에 의해 묽어지다란 뜻을 지닙니다.
3. 김치나 젓갈 따위의 음식물이 발효되어 맛이 들다. '잘 삭은 김치', '홍어가 잘 삭았네'처럼

(3)의 뜻이 오늘 시에 해당합니다. 이 ‘삭다’는 단순히 음식물의 ‘맛이 들다’란 뜻 말고 사람에게도 쓸 수 있습니다. ‘세파에 시달렸지만 잘 삭아 멋진 사람이 되다.’ 등.
이때 ‘삭다’에 ‘히’를 끼워 넣으면 ‘삭히다’가 되는데, 일부러 삭게 만들 때 쓰는 말입니다. ‘밥을 삭혀 단술로 만들다.’ 등.

“견디기 힘든 고난도 따뜻이 위로하면 / 아픔이 삭는다”

다들 요즘 삶이 팍팍하다고 합니다. 이럴 때 누군가 곁에 와서 아픔과 슬픔과 힘듦을 함께 나누면 위로를 받습니다. 덜 익은 포도도 잘 삭히면 맛있는 포도주가 되듯이 삶의 고난도 잘 삭히면 오히려 힘이 됩니다.

“잘 삭은 홍어를 가운데 두고 / 응어리진 마음도 잘 삭히면 / 서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홍어를 못 먹다가 한 번 맛을 알게 된 뒤 그 맛에 반해 즐겨 먹습니다. 만약 응어리진 두 사람이라도 잘 삭힌 홍어 안주 삼아 술 마시면 잘 풀리겠지요. 그처럼 눈물도 잘 삭으면 슬픔을 씻어내는 강이 됩니다. 그러면 현재의 팍팍함도 녹이는 강이 될지도...

“삭는다는 것 / 상처받은 사람만이 삭을 줄 안다”

아픔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아픔을 맛보지 않은 사람보다 아픔을 치료해 주기 쉽겠지요. 삶에 지쳐 힘들 때 남에게 끌어안겨 본 사람이라야 힘들어하는 남을 끌어안기가 더 쉽듯이.

“쓴잔을 앞에 두고 / 눈물 흘려본 사람만이 / 잘 삭은 술을 마실 수 있다”

소주가 다른 술보다 더 맛있게 느껴짐은 쓴맛이 들어있어서 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쓴맛을 느껴본 사람이 소주를 즐길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그러다 좀 형편이 나아지면 소주 대신 위스키나 와인을 찾게 되는데 아직도 제가 소주를 좋아함은 현재의 제 삶을 쓰게 느끼기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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