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년)
#. 안도현 시인(1961년생) : 경북 예천 출신으로 1981년 [대구매일] 신춘문예와 1984년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 고교 재학 때부터 국내 백일장을 쓸고 다녔으며 그 능력을 인정받아 원광대 국문과 문예장학생이 됨. 중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 전교조 결성 관계로 해임되었으며, 나중에 우석대 문창과 교수로 등용. 현재 단국대 문창과 부교수이며, 정치적 사안에 굵직한 목소리 내면서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는 시인이기도 함.
<함께 나누기>
작년 컴퓨터 내장하드가 망가지면서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 충격이 컸습니다. 특히 소설 창작물과 시 배달 자료가 없어져. 20년 넘게 시를 배달하고 있는데, 그 시들이 5년 전부터 배달한 모 밴드에 저장된 걸 제외하곤 다 없어졌습니다. 자료 없어짐이 무조건 짜증 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다행한 점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덕분에 예전 시를 새로 공부하게 되었다는 사실. 오늘 안도현의 '스며든다는 것'도 십 년 전쯤 배달한 작품이며, '너에게 묻는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등도 사라졌으니 다시 읽어보게 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흔히 ‘간장게장’을 밥도둑이라 합니다. 저는 양념게장 간장게장 둘 다 먹지만 만약 하나를 택하라면 양념게장이 더 입에 맞습니다. 밥도둑이란 말엔 특정 반찬을 중심으로 밥을 먹다 보면 밥이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게 한 그릇을 뚝딱 비우기에 생겨난 말입니다. 만약 국어 시간이라면 선생님은 이 시의 주제를 '모성애'라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간장에 담근 꽃게에서 '모성애'를 발견하는 내용이니까요. 다만 이 시 만들기 위해 애쓴 시인의 노력을 잠시 살펴봅니다. 적어도 화자는 간장게장 담그는 일을 곁에서 오랜 시간 지켜봤을 겁니다.
처음엔 맛있는 반찬이 만들어지는 걸 보며 입맛을 다셨는지 모르겠지만 알을 품고 간장에 절여진 꽃게를 보며 잠시 먹먹했을 겁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간장게장과 그 재료인 꽃게. 대부분 맛있다고만 느꼈을 뿐이나 시인의 눈엔 다른 면도 보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과학자를 닮고, 마음은 철학자를, 그려내는 솜씨는 화가를, 리듬감은 음악가를 닮아야 한다는 말이 나왔는가 봅니다. 간장에 절여지는 꽃게가 하필 알을 잔뜩 품고 있습니다. 순간 꽃게 웅크리는 모습이 화자의 눈엔 자기 새끼를 지키려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간장이 몸으로 스며들수록, 꽃게는 알을 더 껴안고 웅크리고, 웅크리다 보니 더욱 밑바닥에 가라앉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간장이 꽃게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면서 꽃게는 자신이 간장에 절여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깨닫습니다. 자식들(알)은 아무것도 모른 채 겁에 질려 있고. 그래서 꽃게는 새끼에게 나직하면서도 다정하게 한마디 합니다.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저는 이 시구에서 예전에 본 영화,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유태인 한 가족을 그린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내일 아침 자신이 죽게 됨을 깨닫자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고 평화가 담긴 목소리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들려줍니다. 아이들은 뭔지 모르는 불길함에 으스스 떨리는 마음이다가도 엄마가 들려주는 얘기를 들으며 행복한 미소를 띠며 잠을 잡니다.
제목 '스며드는 것'에서 ‘스며드는’이 뜻하는 바를 잠시 뒤적여봅니다. 우선 꽃게에 간장이 스며든다는 뜻입니다. 다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알들에게 엄마의 사랑이 듬뿍 스며듦을 뜻할 게고. 시어가 지닌 이런 함축성이 시 읽는 맛을 주겠지요.
이 시와 관련된 재미있는 시인의 말을 전합니다. “혹 이 시 읽고 나더러 간장게장 먹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천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간장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