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49)

제249편 : 고정희 시인의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오늘은 고정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년)

#. 고정희 시인(1948~1991년) : 전남 해남 출신으로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이며, '여성해방공동체'를 구상하는 등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함께 나누기>

살아있을 때는 모르고 지내다 먼 길 떠나고 난 뒤 알게 된 시인으로 첫째 고정희며, 가수로는 김광석입니다. 왜 이 시인을, 왜 이 가수를 진작 알지 못했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그때 관심 기울였으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고정희 시인의 시 가운데 사랑을 노래한 시가 많습니다. 처음 읽으면 마치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연시(戀詩)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시에 나오는 ‘너’ '그대' ‘당신’은 연인이 되겠지요. 물론 그렇게 읽어도 됩니다.

다만 고정희 시인을 안다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특정 한 사람’보다 자기에게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간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거기엔 부모님도 벗도 동료도 뜻을 같이 한 동지도 다 포함됩니다. 이렇게 넓혀 보면 또 시가 다르게 읽힙니다.

우선 오늘 시는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1987년 펴낸 [지리산의 봄]에 실린 작품과 오늘 보내는 [아름다운 사람 하나]에 실린 작품. 두 작품의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길이 면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두 배쯤 깁니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할 시란 뜻입니다.
3년 지나 다시 펴낸 시집에 시인이 '수정본'이라는 말을 덧붙였기에 오늘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만 짬나시면 전자도 읽어보시길 부탁합니다. 이 시에서 제목이 주는 힘이 참 큽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이 제목 앞에 끌려가지 않을 사람 아마 없겠지요.

시로 들어갑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살아가면서 날마다 부딪히는 여러 복잡한 일로 기억해야 할 사람을 잊고 살 때가 종종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바쁘다 보면 잊었다가 조금 한가해지면 그가 떠오릅니다.
그 순간 ‘아차!’ 하지요. 그는 그냥 잊고 지내도 될 사람이 아니었는데, 한때 내 삶의 모두였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이 시구에 빨간 줄 쳐놓았습니다. ‘사무치게’ ‘무척이나’ ‘흠뻑’이라는 말보다 ‘잉잉하게’가 주는 함축성이 너무 좋아.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대 향한 그리움의 불꽃이 꺼졌다 다시 장작불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날이 오면 나는 다시 바람이 됩니다, 불길 치솟게 하는. 그리고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그대 생각하며 잠들고, 일어서고, 뛰어나갑니다.

이 시 이해에 ‘너’라고 지칭되는 인물에 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처음 펴낸 시집에 실린 시에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시구가 나옵니다. (오늘 두 번째 시집에선 사라짐)

“오오 그러나 너는 /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어디에도 부재중입니다. 이 말은 현실 세계에선 만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날 수 없기에 더욱 그리운 사람, 잃어버렸기에 더욱 생각나는 사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그래서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 길을 걷다가도 그대는 불쑥불쑥 나타났다가 손 내밀면 이내 사라지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우면 나는 또 울고 말 거라고 화자는 읊조립니다.

<뱀의 발(蛇足)>

고정희 시인은 남성 위주의 세계에 반기를 들고 싸웠습니다. 권위적인 남자가 타도 대상이지만 그런 남자에 굴종하는 여자도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란 시집에 실린 “다섯째 거리 – 길 닦음 마당”을 한 번 볼까요.

오늘날 어찌하여 민주길이 막혔는고 하니
복종생활 순종생활 굴종생활 '석삼종' 때문이라
여자팔자 빙자해서 기생 노릇하는 여자
현모양처 빙자해서 법적 매춘하는 여자
사랑타령 빙자해서 노리개 노릇하는 여자
미모 빙자해서 사치놀음 하는 여자
가정교육 빙자해서 자녀차별 하는 여자
남편출세 빙자해서 큰소리치는 여자
남자신분 빙자해서 투기노름 하는 여자
전통 빙자해서 자기비하 하는 여자
학벌 빙자해서 무위도식 하는 여자
삼종지도 빙자해서 천리까지 기는 여자
부창부수 빙자해서 청맹과니 되는 여자
부계혈통 빙자해서 창씨개명 하는 여자
나약함 빙자해서 홀로 설 수 없는 여자
ㆍ ㆍㆍㆍ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