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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51)

제251편 :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 오늘은 황지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게눈 속의 연꽃](1990년)

*. 애리다 : ‘아리다’의 (경상, 전라, 강원, 평안) 사투리

#. 황지우 시인(1952년생, 본명 '황재우') : 전남 해남 출신으로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기법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여 1980년대 한국 현대시의 전성기를 이끈 시인이라 평가받음.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및 총장을 역임




<함께 나누기>

김춘수 시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꽃」을 두고 두 가지 평가가 존재합니다. 국어선생님들은 ‘존재의 본질과 의미, 그리고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탐구하는 시’라고 어렵게 해석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사랑을 노래한 연시(戀詩)로 여깁니다.
그저께 배달한 고정희 님의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란 시에서 ‘너’의 정체를 '잊을 수 없는 그리움 남기고 사라져 간 사람'은 모두 다 된다고 했는데, 읽은 분들은 사실 사랑하는 연인으로 느끼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을 겁니다.

오늘 시도 언뜻 읽으면 연시처럼 여겨집니다. 제목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면 가장 이해가 쉬우니까요. 그럼 학교에선 어떻게 가르칠까요? 시인 스스로 시집 후기에 ‘민주, 자유, 평화’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특히 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시인의 전력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허지만 굳이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학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그 작가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다.’라는 명언이 있으니까요. 오늘 시는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너’를 '민주 자유 평화'를 뜻하기보단 사랑하는 여인을 가리킨다고.
이 시는 읽기 편하고(운율), ‘너’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고(함축성), 간절한 기다림을 절묘하게 묘사하여 시인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가슴 꽉 찬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다 아실 겁니다. 온 세상이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으니까요. 꽃을 보면 그녀가 떠오르고, 꽃의 향기를 맡으면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고, 꽃이 흔들리면 그녀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혹시 온다고 했으나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고, 빨리 오지 않을 땐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합니다. 두려움과 조바심은 가슴속을 갈퀴로 마구 헤쳐놓습니다. 그 아리는 마음을 한 번쯤 경험해 보지 않은 분이 계실까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이 장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러 번 보았겠지요. 아니 어쩌면 이 시구 읽은 감독들이 그런 감정을 배우에게 넣도록 지시했을 지도. 혹시나 그녀일까 고개를 들었다가 아님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어쩜 내가 잘못 봤나 하여 지나간 여자의 뒤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이 구절을 두고 '너'를 연인이기보다 '민주 자유 평화'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꽤 됩니다. 암울했던 1980년 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민주화,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천천히 걸어오는 발길 기다리는 간절함을 표현했다고.


이 시의 가장 뛰어난 점은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일상적인 언어로 이렇게 아름답고도 간절한 기다림을 노래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너’를 딱 하나로 규정짓지 말고, 내게 있어야 할 정말 소중한 것이지만 지금은 없는데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어떤 것이라고 해 주시길.

마지막으로 한 평론가의 말을 덧붙입니다.
‘이 시는 부재와 상실이라는 절망적 순간에서 오히려 희망을 건져 올리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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