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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52)

제252편 : 오탁번 시인의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늘은 오탁번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사랑 사랑 내 사랑
오탁번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 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 [눈 내리는 마을](2013년)

*. 저녁답 : ‘저녁때’의 경남 사투리

#. 오탁번 시인(1943년~2023년) : 충북 제천 출신. '67년 [중앙일보]에선 시인으로, '69년 [대한일보]에선 소설가로 등단.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으며, 아내인 김은자 시인 역시 한림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부부 시인인데, 재작년에 돌아가심.




<함께 나누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를 잘 쓰는 시인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갈래로 나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재미있는 시를 쓰는 시인은?' 하면 일치합니다. 알려진 몇 편만 대면 누군지 다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폭설」 「굴비」 「해피버스데이」 하면 떠오르는 분, 바로 오탁번 시인.

오늘 시를 읽는 순간 어디서 본 내용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겁니다. 당연하지요, 너무나 유명한 우리 고전에서 이미 수십 번 읽고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요. 제목인 ‘사랑 사랑 내 사랑’과 숫메뚜기가 암메뚜기 등에 업혀 노는 장면에서 떠오르는 작품 있지요? 네 그렇습니다. [춘향전]입니다.
판소리 춘향가에서 [사랑가] 한 구절을 볼까요?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시로 들어갑니다.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 암놈 등에 업힌 / 숫메뚜기의 / 겹눈 속에 아롱진다”

가을날의 아름답고 풍요로움이 듬뿍 배인 시행입니다. 혹 메뚜기 눈이 몇 개인지 아십니까. 기본적으로 한 쌍의 커다란 겹눈과 세 개의 작은 홑눈이 있습니다. 겹눈은 물체의 모습을 볼 때, 홑눈은 밝기 구별할 때 쓰는데, 이런 겹눈은 홑눈일 때보다 물체의 모습이 보다 뚜렷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숫메뚜기 겹눈의 쓰임을 한 번 봅니다. 언제 겹눈이 쓰였느냐 하면 바로 사랑을 나눌 때입니다. 사람에게도 눈이 여러 개이면 사랑의 눈길을 정겹게 보낼 수 있고, 보고픈 님의 얼굴을 보다 뚜렷이 볼 수 있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돌아서면 또 보고 싶으므로 겹눈이면 더욱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 저녁답에 피어날 / 박꽃을 흉내 낸다”

배추밭을 찾아가던 흰나비가 가던 길을 멈추고 박넝쿨에 앉아 저녁때 박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왜 하필 배추흰나비가 박꽃이 피어나길 기다릴까요? 그건 박꽃 잎이 흰나비의 날개와 같은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사진 참조)
배추흰나비는 자기를 닮은 박꽃에서 자신의 짝을 찾으려 했습니다. 흔히 ‘나비가 꽃을 찾다’란 말처럼 나비가 사내라면 꽃은 여자가 될 터. 허니까 배추흰나비가 박꽃을 만남으로써 사랑의 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 나도 / 메뚜기가 되어 /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겹눈을 가졌기에 눈썰미가 좋아 (수컷) 메뚜기와 (수컷) 배추흰나비가 서로의 짝을 찾아 사랑을 나눕니다. 그 둘처럼 나도 그대 등에 업히고 싶습니다. 이때 '업히다'는 말의 뜻을 다 아시겠죠. 춘향가에 나오는 구절을 생각하면.

(눈썰미는 마음에 드는 짝 찾는데 뛰어난 능력을 비유한 표현이겠지요)


아주 풍요로운 가을 들판의 평화를 그린 시인 듯한데, 거기에 노골적인 사랑의 행위를 은근히 담은 재치가 이 시를 에로틱하게 만듭니다.


(위 배추흰나비, 아래 박꽃)


시인의 재미있는 동시 한 편 더 소개합니다.

- 아빠 -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나한테 늘 하는 말이 있다
- 에헴, 아빠는 어릴 때
잉크가 어는 방에서 공부를 했다!

아빠는 이글루에서 살았나?
- [벙어리장갑](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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