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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58)

제256편 : 김연성 시인의 '발령났다'

@. 오늘은 김연성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발령났다
김연성

그는 종이인생이었다 어느 날
흰 종이 한 장 바람에 휩쓸려 가듯 그 또한
종이 한 장 받아들면 자주 낯선 곳으로 가야 했다
적응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명인가
타협이란 또 얼마나 힘든 악수이던가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읽지 못할 것이다
얇은 종잇장으로는 어떤 용기도 가늠할 수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 골목의 정체 없는 어둠이다
그는 늘 새로운 임지로 갈 때마다 이런 각오했다
"타협이 원칙이다
그러나 원칙을 타협하면 안 된다"

나일 먹을수록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모없다고
누군가 자꾸 저 세상으로 발령 낼 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원칙까지도 타협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허리까지 휘어진 어둠 속에서
꺼억꺼억 토할지 모른다
모든 과거는 발령 났다 갑자기,
먼 미래까지 발령날지 모른다

시간은 자정 지난 새벽 1시,
골목 끝에 잠복해 있던
검은 바람이 불쑥 낯선 그림자를 덮친다
- [발령났다](2011년)

#. 김연성 시인(1961년생) :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2005년 [시작]을 통해 등단. 현재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매뉴얼대로 살아가는 감정노동자의 심리를 잘 파헤쳤다는 평을 들음
동명이인으로 [슬픈 하이에나]란 시집을 펴낸 김연성 시인(1948년)이 있습니다.







<함께 나누기>

3년 전 강화군 단위농협에 근무하던 한 여직원이 섬인 '볼음도 분점'으로 갑자기 발령 났다는 뉴스가 시청자의 분노를 샀습니다. 평소 권위적인 조합장의 말에 한 번 말대꾸했다고 인사 담당자를 시켜 초등학교도 없는 섬인 볼음도로 발령을 냈습니다.
조합장이란 작자가 “넌 가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니까 잘 있다 와, 너 마음대로 해. 자식아!” 하며 욕하면서 강제발령 보냈다 하는데... 문제는 그 여직원에게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섬지역으로 발령 나자 다닐 학교가 없어지게 되었답니다.

샐러리맨에게 발령은 참 힘든 선택의 강요지요. 요즘에야 아무리 먼 곳이라도, 한직이라도 자르지 말고 그저 발령만 내주면 좋겠다는 말도 나옵니다만. 발령받는다는 것, 우리 대부분에게 기존에 있었던 인연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밀려온다는 암시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발령장이란 종이 한 장에 인생이 걸렸다 하여 시인은 '종이인생'이라 정의합니다. 그럴 때 종이는 비록 한 장이라도 엄청 무서운 힘을 지닙니다. 아무리 그 자리를 버티려 해도 종이 한 장 받아 들면 그 종이가 바람에 휩쓸려 가듯 아주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니까요.

“적응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명인가 / 타협이란 또 얼마나 힘든 악수이던가”

낯선 곳에 가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힘들면 비명을 질러야 하는 걸까요? 특히 내성적인 사람은 견디기 참 어렵습니다. 윗사람에게 적당히 아부하며 적당히 비위 맞춰가며 살아야 하는데, 그런 얄팍한 짓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타협은 더욱 힘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 그 골목의 정체 없는 어둠이다”

나를 발령 낸 사람은 나름의 이유로 그랬겠지만 평소 그런 속내를 드러내줬으면 미리 각오 좀 했으련만 칼자루 쥔 그의 속 읽지 못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압니다. 그의 마음속은 캄캄한 어둠이었다고. 그래서 그의 속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타협이 원칙이다 / 그러나 원칙을 타협하면 안 된다"

타협하며 살아감이 원칙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극단적인 정치 현상이 초래된 배경에는 타협 없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필요할 때 타협은 해야 합니다. 허나 원칙을 무너뜨려 가며 타협해선 안 됩니다. 원칙은 타협의 협상 대상이 아니니까요.

“모든 과거는 발령 났다 갑자기, / 먼 미래까지 발령날지 모른다”

일단 발령이 나는 순간 여태까지의 일은 과거가 됩니다. 기존 직장을 머릿속에서 내쫓아야 새로운 미래가 펼쳐집니다. 이리 보면 산다는 일이 매일매일 새로운 날로의 발령은 아닐까요. 어제와 오늘은 다르기에 내일이면 새로 발령받은 세계에서 살아야 함을.

끝내려니 이 시구가 내내 목에 걸립니다.

"나일 먹을수록 /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모없다고 / 누군가 자꾸 저 세상으로 발령 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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