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편 : 강영란 시인의 '다짐'
@. 오늘은 강영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다짐
강영란
입춘도 지났으니 이제 꽃 오겠다
꽃 오면 보러 가자 엄마
*자그락자그락 밥 먹다가
별이 참 밝네
말 뒤끝에
꽃 약속 미리 받아놓으려는데
다짐받으려 말어라
늙으면 다짐들이
다 짐이 된다
그 옛날 다짐들이 다 짐이 되어오는 저녁
- [염소가 반 뜯어먹고 내가 반 뜯어먹고](2017년)
*. 자그락자그락 : 1. 하찮은 일로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모양 2. 잔 자갈밭 따위를 가볍게 밟을 때 잇따라 나는 소리.
#. 강영란 시인(1968년생) : 제주도 서귀포 출신으로 1998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10년 [열린시학]을 통해 등단. 현재 제주도에 감귤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시 속에 제주의 문화를 담은 내용이 많음
<함께 나누기>
우리는 종종 '~를 걸고 나는 맹세를 했다' 또는 ‘~~ 다짐을 했다'와 같은 표현을 합니다. 맹세와 다짐, 이 둘은 같은 뜻일까요 다른 뜻일까요? 사전을 찾아보니, 맹세는 '일정한 약속이나 목표를 꼭 실천하겠다고 다짐함'이고, 다짐은 '마음이나 뜻을 굳게 가다듬어 정함'입니다. 그러니 비슷하다 해야겠지요.
시로 들어갑니다.
화자는 자기 엄마에게 입춘도 지났으니 꽃이 필 테고 꽃이 피면 꽃놀이 가자고 합니다. 그 말을 엄마는 조용히 듣고 있을 뿐 답이 없자, 화자는 '별이 참 밝네.' 하며 말 돌리는 척하다가 꽃놀이 날짜를 못 박으려는데 엄마가 말을 꺼냅니다.
"다짐받으려 말어라 / 늙으면 다짐들이 / 다 짐이 된다"
독자는 당연히 의문이 들 겁니다. ‘그러마!’ 한 마디면 끝나는데 에둘러 반대의사를 밝히는 까닭을요. 왜 그랬을까요? 딸의 형편 생각해서, 아님 자신의 건강 때문에?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마치 스님들의 선문답처럼.
"그 옛날 다짐들이 다 짐이 되어오는 저녁"
마지막 시행에서 어느 정도 답이 잡힙니다. 모녀 사이에 아무리 다짐을 해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엄마는 그걸 잘 압니다. 꽃놀이 가자는 딸의 '다짐'에 ‘그러마!’ 했다가 딸이 이루지 못할까 봐 엄마는 선뜻 답을 못합니다.
다짐을 하고 그 다짐에 답을 하면 형편(금전, 시간)이 안 되는 상황에서 무리해서라도 약속 지키려 애쓸 딸, 그리고 지키지 못했을 때 괴로워할 딸의 모습 때문에...
현재 형편이 안 돼 바로 실천할 수 없을 때 이런 다짐이라도 하면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지키지 못할 때 따르는 부담감. 그래서 가장 편한 방법인 말로 다짐(약속)을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마음의 짐이 됩니다. 어떤 땐 엄청난 무게로.
자 여기서 눈에 띄는 표현을 봅시다.
“다짐받으려 말어라 / 늙으면 다짐들이 / 다 짐이 된다”
“다짐들이 다 짐이 되어오는”
‘다짐’이 ‘다 짐이 되는’ 같은 표현은 참 재치있는 언어유희입니다. 거기에 함부로 다짐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았습니다.
다짐을 하지 않고 사는 하루가 있을까요? 자그마한 다짐이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납니다. 남과의 약속도 그렇지만 자신과의 약속에서도 다짐은 존재합니다. 다짐을 할 때는 꼭 이루겠다는 전제를 밑에 깔지만 그게 사람 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종종입니다. 어떤 땐 운명이, 어떤 때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가 다짐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말을 빌린 시인의 언어유희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도 들어있다고 봐야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