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편 : 복효근 시인의 '각시붓꽃을 위한 연가'
@. 오늘은 복효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각시붓꽃을 위한 연가
복효근
각시가 따라나설까 봐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 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 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시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시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뼛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있습니다
각시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 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 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 [목련꽃 부라자](2005년)
*. 산비알 : '산비탈'의 사투리
#. 복효근 시인(1962년생) : 전남 남원 출신으로 1991년 [시와시학]을 통해 등단. 전북 남원시 소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했으며, 교과서에 여러 시가 실려 있을 정도로 좋은 시를 많이 씀.
어제 나희덕 시인을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좋은 시를 많이 쓰는 여성시인'이라 소개했는데, 오늘은 '이름 많이 알려지지 않지만 좋은 시를 많이 쓰는 남자시인'으로 소개합니다. 바로 복효근 시인.
<함께 나누기>
어느 방송에선가 다정하게 손 잡고 가던 남편과 아내가 나왔습니다. 아마 개그 프로 아니면 코믹드라마에서 본 내용인 듯. 아내가 내미는 손을 억지로 잡고 가던 남편이 마침 곁을 스쳐가는 미녀를 보고 고개 돌리는 순간, 그 행동에 뿔이 난 아내가 확 채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시로 들어갑니다.
붓꽃은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먹물 묻힌 붓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부채붓꽃이나 꽃창포를 생각하면 됩니다. 헌데 오늘 시에 나오는 각시붓꽃을 흔히 보이는 붓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붓꽃은 대부분 개울 같은 물가에 피지만 각시붓꽃은 다르기에.
각시붓꽃은 산속에서 자라며 키가 30cm 정도로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꽃도 붓꽃에 비해 무늬가 덜 화려하고 빛깔도 옅습니다. 시에서처럼 수줍은 각시가 떠오르는 꽃입니다. 일반 붓꽃에 비해 예쁘고 아담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산속에 피어 '각시'란 앞말이 붙었답니다.
"각시가 따라나설까 봐 /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 둘러대고는"
'아내가 따라나설까 봐' 대신 '각시가 따라나설까 봐'로 표현한 까닭을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각시붓꽃 이름과 연결시키는 아주 깜찍한 언어유희. 사실은 홀로 산행 나서면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라도 만나 동행하면 심심치도 않고 괜히 기분도 좋고. 홀로 다니려는 남자의 나쁜 마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 저기 저기 각시붓꽃 피어있습니다"
각시붓꽃의 생태적 특성을 빌려와 지은 시구이나 아내랑 연결시키면 묘하게 일치하는 지점이 보입니다. '눈길 주지 않는'에 주목합니다. 물론 산비탈에 피기에 주목 끌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남편 눈에 아내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도 담았습니다.
내 아내는, 키가 작고 허리 굵고 화장술도 서툴러 촌스럽고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아닌 꽃입니다. 세상에! 그 아내가 꽃이 되어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은 최고로 잘난 사내라 뭇 여인들의 눈길 받을까 봐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뼛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은 꽃으로. 그런 각시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 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서 괜스레 조신하게 행동하렵니다. 아내 대신 나의 헛짓 감시하는 꽃이라.
"새삼 스무 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나도 한때는 깨끗한 남자였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만 눈을 주는. 나이 들면서 시력은 약해졌지만 딴 여인 보는 시력은 높아졌습니다. 나이 들면서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은 희미해졌건만 뭇 여인에 대한 사랑은 넓어졌습니다.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버전일까요?
<뱀의 발(蛇足)>
늘 펑퍼짐한 옷 입고 화장도 안 하고 항상 졸린 듯한 아내 얼굴에 실망한 남편을 대상으로 실험한 영상을 본 적 있습니다. 그 아내에게 최고 메이컵아티스트의 관리를 받게 한 뒤, 최고급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 신고, 샤넬백 들고서 남편 퇴근길에 나서게 했습니다.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걷다 앞에 오는 미녀(?)에 눈이 번쩍 뜨여 지나간 뒤에도 한참을 바라봅니다. 자기 아내라곤 전혀 생각 못하고. 다시 아내가 지름길로 한 번 더 그 앞을 지나가자 입을 헤벌린 채 보기만 할 뿐 누군지 눈치 못 챕니다.
이번엔 제작진이 남편에게 길을 묻는 등 하며 시간 끄는 사이에 아내가 집에 먼저 들어가 남편을 기다립니다. 귀갓길에 본 미녀와 잠시 후 볼 찌든 아내를 비교하며 찡그린 채 문을 열자 눈앞에 나타난 여자, 그제사 비로소 아내였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합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