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편 : 나희덕 시인의 '숲에 관한 기억'
@. 오늘은 나희덕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숲에 관한 기억
나희덕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 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랑은 소음이라고?
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가?
그 숲이 있기는 있었던가?
그런데 웅웅 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 [야생사과](2009년)
#. 나희덕 시인(1966년생) :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건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정직한 시를 쓴다는 평을 들으며,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창과 교수
<함께 나누기>
요즘 상가(喪家)에 가는 일이 많다 보니 거기서 만난 사람들끼리 장례 절차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합니다. 아직도 무덤 만들어 거기에 묻히고 싶다는 분들이 계시지만 대체로 화장해서 납골당에 안치하길 원하는 사람이 많습디다.
누가 제게 물어 어떻게 답할까 하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단번에 답이 나왔습니다. 화장하여 남은 뼛가루를 다시 납골당에 넣기보다 그냥 숲에 가 아무 곳이나 뿌리라고. 아니면 선산까지 갈 수 있다면 거기 숲에 뿌리라고.
저는 지금도 숲이 참 좋습니다. 처음 달내마을로 왔을 때 우리 집을 앉힐 위치가 딱 마음에 들었습니다. 바로 앞뒤가 숲이었으니까요.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오면 앞산이 숲이요, 눈을 돌려 뒷산을 보면 역시 숲입니다. 앞뒤 숲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개운해지는지...
시로 들어갑니다.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 오기는 왔던가?”
사랑은 마술사의 손에 담긴 비둘기 같습니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잠깐 사이에 하이얀 비둘기가 손에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사랑은 그 비둘기처럼 우리 눈을 잠시 멀게 한 뒤 잠시 머물다가 이윽고 빈 손바닥만 남기며 사라지기도 합니다.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 젖은 나비 날개처럼?”
사랑이 다가와 가슴 두드리는 순간을 포착한 시행입니다. 사랑은 갑작스럽게 비논리적으로 나타나 우리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그런 사랑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마른 흙에 내린 빗방울이 비 그치면 맨땅을 드러내듯이, 물 고인 웅덩이가 말라버리듯이, 나비의 젖은 날개가 마르듯이...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 더 붉어졌던가?”
분명히 너랑 숲을 향해 나란히 발 맞춰 걸었건만,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건만, 숲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건만 이제는...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게 맞는지, 함께 한 시간이 사랑으로 가득 찼는지, 너랑 나의 마음은 한 가지 지점을 향해 갔는지, 두 마음은 진실했는지...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우리가 숲에서 사랑할 때 수천 마리 꿀벌이 날개 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그걸 '황홀한 소음'이라 했지요. 그렇게 황홀한 소음을 만들어내던 그 숲은 지금 있기는 하는지요? 아니 그때 그 숲이 있기는 했는지요? 이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웅웅 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이 시행에서 갑자기 먹먹해집니다. 그렇게 우리 사랑의 황홀함을 꾸미던 그 숲, 그 꿀벌들은... 이젠 없습니다. 사랑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한용운 님의 「님의 침묵」에서 퍼옴)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끝으로 오면서 이 시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슬픔을 쏟아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에 빠졌던 순간, 사랑했던 날들이 이어졌지만 지금은.. 화자는 그 시절을 잊지 못함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리되었는지, 너와 나의 사랑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그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 숲은 어디로 갔는지. 한때 숲은 거기에 뿌리박혀 있으니 우리의 사랑도 영원히 머물 줄만 알았는데. 숲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듯 사랑도 영원할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