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편 : 유승도 시인의 '나의 새'
@. 오늘은 유승도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나의 새
유승도
내가 인간 세계에서 승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듯이
새의 세계에서 새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알고 싶다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저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 승도야
-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1999년)
#. 유승도 시인(1960년생) : 충남 서천 출신으로 1995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1998년부터 현재까지 강원도 영월 망경대산 중턱에 버려진 오두막집을 손보아 염소 몇 마리, 고추, 두릅,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음.
<함께 나누기>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고,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는 속뜻을 음미하며 읽어야 하고, 류시화 시인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뜨거운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읽어야 한다면, 오늘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참 따뜻한 시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시 쓰려면 새와 얘기를 주고받을 수준은 돼야겠지요. 또 새와 대화하려면 그냥 '방울새야! 박새야! 곤줄박이야!' 하고 그 새의 종(種)만 부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 세계에서 통하는 이름을 불러주면 더욱 좋겠지요. 네 목소리는 초롱초롱 하니 ‘초롱이’로, 네 목소리는 달콤하니 ‘달달이’로, 네 목소리는 카랑카랑 하니 ‘카랑이’로...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사람끼리 서로 만나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상대 이름을 물어보는 일이고, 친해지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행동도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일입니다. 누군가가 내 이름 부르면 기쁘듯이 새들도 자기에게 맞는 자기 이름으로 불러주기 바란다는 이 소박한 표현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시인은 1980년대 초 일상으로 길을 가는데 신군부의 군인들에게 걸려 아무 죄도 없이 죽도록 얻어맞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사람을 기피하게 돼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도피하다시피 찾은 강원도 정선 폐광촌 빈 사택에서 창문마다 모두 두꺼운 검은 종이를 붙여놓고 쉼 없이 잠을 자다, 밖에서 꿈결처럼 들리는 새소리에 비틀거리며 책상에 가 시를 썼습니다. 그 뒤부터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펜을 듭니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그 새들이 아침마다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아침이야! 아침이야!' 하면서 창문 앞에서 화자에게 환한 아침을 안겨줍니다. 시인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버림받아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도 자기를 찾아주는,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요. 그러면 살맛 난다고.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 승도야"
내가 새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니 새가 나에게 화답할 차례입니다. 새가 "승도야!" 하고 내 이름 부릅니다. 물론 진짜 새가 사람 이름을 부를 리 없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순수성, 새와 교통하려는 이런 고운 마음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한결 살만해질 것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시론'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이름 모를 새가 노래하고 있다’ ‘산을 오르다 이름 모를 꽃을 보았다’ 하는 식의 표현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왜 이름이 없느냐고? 모르면 찾아서 새나 꽃이나 나무의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고. 그렇지만 저처럼 기억력 없는 사람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일단 나무 이름, 꽃 이름은 놔두고 우리나라에 사는 작은 새 이름만 쭈욱 나열해 봅니다.
‘딱새’ ‘멋새’ ‘물총새’ ‘곤줄박이’ '박새' ‘뱁새’ ‘벌새’ ‘상모술새’ '콩새' ‘오목눈이’ ‘종다리’ ‘찌르레기’...
아직 몇 종류밖에 알지 못하지만 짬 날 때마다 외워둬 녀석들이 날아오면 이름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인처럼.
*. 첫째 사진은 '흰머리오목눈이'인데 우리나라에 드문드문 목격된다고 합니다. 빛깔이 이쁘고 귀여워 실었습니다.
둘째는 KBS 내추럴 휴먼 다큐멘터리 <자연의 철학자들> 15회 ‘오늘도 유유자적 - 유승도 시인 편'에 나온 시인 부부의 모습입니다. 워낙 자연인처럼 사는지라 실제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한 적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