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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91)

제291편 : 곽재구 시인의 '세월'

@. 오늘은 곽재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세월
곽재구

하얀 민들레 곁에 냉이꽃
냉이꽃 곁에 제비꽃
제비꽃 곁에 산새콩
산새콩 곁에 꽃다지
꽃다지 곁에 바람꽃

소년 하나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네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걷다가 시 쓰고
걷다가 밤이 오고
밤은 무지개를 보지 못해
아침과 비를 보내는 것인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 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2019년)

#. 곽재구 시인(1954년생) : 광주 출신으로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순천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으며, 무게감 있고 울림이 큰 시를 쓴다는 평을 들음. 현재 순천시가 제공한 창작의 집 '정와(靜窩)'에서 시를 쓰며 가르치며 생활.




<함께 나누기>

화가는 ‘자화상’이란 제목의 그림을 한 편씩 남깁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자화상에 해당하는 ‘서시’ 비슷한 작품을 남깁니다. 자신의 모습을 붓으로 그리고, 글로 쓰고픈 욕망은 다 갖고 있나 봅니다. 오늘 시는 자신의 일대기를 요약한 듯한 작품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소년 하나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네”

소년은 어릴 때의 화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화자는 시를 쓰고 싶었나 봅니다. 그럼 그때 소년은 무엇을 글감으로 잡았을까요? 꽃입니다. 화자가 어릴 때 들판엔 들꽃이 지천으로 피었습니다. 하얀 민들레, 냉이꽃, 제비꽃, 산새콩꽃, 꽃다지, 바람꽃 등.
이름 아는 꽃도 있고 처음 들어보는 꽃도 있지요. '바람꽃'은 강원도에서 주로 보이는데 여름에 흰꽃이 핍니다. '산새콩'은 강원도 이북에 자생하며 여름에 홍자빛 꽃이 피고, '꽃다지'는 냉이와 생태가 비슷한데 꽃이 노래서 ‘노란 냉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가운데 산새콩꽃과 바람꽃은 여름에 피지만 시에 나오는 민들레꽃 냉이꽃 제비꽃 꽃다지는 봄에 핍니다. 이로 하여 시인은 소년과 봄을 교묘하게 연결시킵니다. 소년기는 인생에서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봄과 같다는 뜻을 담지요.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한 계절은 여름이 떠오르지요. 우리가 가장 열정적으로 일할 시기입니다. 시인도 당연히 열심히 시를 쓴 계절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시 속에 “걷다가 시 쓰고 / 걷다가 밤이 오고” 구절을 다음처럼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걷다가 시를 쓰고 밤이 올 때까지 걸으며 시상을 잡고'로.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 이슬 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던 소년은 이제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가까이 있는 이슬 내리는 풀밭에 엎드려 시를 쓰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 시가 더 이어지면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 물결에 배 띄워놓고 노 저으며 시 쓴다는 표현이 나올지도.
‘이슬 밭’의 의미는 늙음과 거리가 멀고 오히려 싱그러움의 이미지를 지닙니다. 하기야 나이 들어도 시인은 늙지 않습니다. 왜? 시와 함께 하기에 시 쓰는 노인에게 꽃향기와 아침과 무지개와 비와 초원과 간이역은 낭만이요, 서정이요, 삶의 동반자 아닐까요.

오롯이 한 길을 걸어온 시인, 지금도 시를 쓰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시인, 시어 한 자 한 자 뽑아내려 열정 기울이는 시인. 굳이 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더라도 늙어서도 자신의 일을 놓지 않고 있는 분이라면 존경하는 마음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제 글 읽는 분들이 대부분 중씰한 연령이라 나이 듦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걸어온 길을 후회하거나,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시는 분, 그런 분들에게 시인은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 밭에 엎드려 시를 쓰는 노인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주려 합니다.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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