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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14)

제314편 : 김영승 시인의 '흐린 날 미사일'

@. 오늘은 김영승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흐린 날 미사일
김영승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럭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쳤고
그 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군락지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및 노인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경회루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쌍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수직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허공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
- [흐린 날 미사일](2013년)

*. 페르골라 : 흔히 ‘파고라’라 하며, 덩굴식물이 타고 올라가도록 만들어 놓은 아치형 구조물

#. 김영승(1958년생) : 인천 출신으로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하여 등단하여 이듬해 [반성]이란 시집을 펴내면서 주목을 받음. 세상에 대한 저항과 정화의 욕망을 배설의 시학으로 그려내는 시인으로 평가받음.
(참, 전남 진도 출신의 동명이인인 시인이 있으니 혼동 마시길)




<함께 나누기>

이 시를 이해하려 한 가지 뉴스를 알아야 합니다.
“1998년 12월 4일 인천시 연수구 봉재산에 위치한 공군방공포대에서 탄두가 장착된 미사일이 잘못 발사되었다. 유도 통제에 실패한 이 미사일은 발사 3초만에 자폭장치에 의해 지상 300m 상공에서 폭발했고, 다행히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는 공군 창군 이래 초유의 사고였다.”

시로 들어갑니다.

“나는 이제 /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나는 이제 느릿느릿게 걷고’까진 이해가 되지요. 느리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니까요. 그런데 뒤의 ‘힘이 세다’는 무슨 뜻일까요? 내가 갑자기 힘이 세졌다는 뜻은 분명 아닐 터. 가능한 느릿느릿하게, 가능한 일 만들지 않고 살면 저절로 삶의 힘(의욕)이 생긴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 벤치에 앉아 있다 /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가만히 있습니다. 시에는 나오지 않지만 할 일이 밀려 있지만 이렇게 잠시 휴식 취하는가 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일에, 아무리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사랑과 미움을 다 떨치고 쉽니다. 그게 스스로 자랑스럽습니다.

“등꽃이 상하로 / 발을 쳤고 / 그 휘장에 가리워 / 나는 /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화자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합니다. 허나 정말 그럴까요?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쳐 나를 가립니다. 가리니까 아무도 보는 사람 없습니다. 허니 잠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 짬에 자신을 오롯이 혼자 둡니다.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겠지요.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 보리밭은 없어졌고 ~~ 내가 그 앞에 있다”

이제 시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미사일 자폭장치가 1초만 더 빨리 작동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미사일이 그리는 궤적 안에 살던 시인은 자신의 삶이 순간적으로 저승으로 이승으로 오고 감을 느껴 이를 글감으로 삼았습니다.

“명자꽃과 등꽃과 / 가로등 쌍 수은등은 / 그 향기를 / 바닥에 깐다”

우리 인간은 위험에 순간 아찔함을 느끼나 꽃과 수은등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아름다움을 빛내려 꽃을 피우고 등불을 밝힐 뿐. 문득 제목은 기억 안 나나 6.25 동란 때 한 무명시인이 쓴 시구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꽃은 웃고 있었다. 포탄이 터지고 총탄이 쏟아지고 피가 튕기는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꽃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급한 일? / 그런 게 어딨냐”

그렇습니다. 급하게 서두를 게 하등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아등바등 살겠다고 발버둥쳐도 오늘 당장 하늘에서 뭐가 떨어질지 모릅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스레 차를 몰아도 저쪽에서 중앙선 넘어 침범한다면... 그러니 악착같이 빠르게 빠르게 살지 말고 느릿느릿 여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멍때리며 보내도 됩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도 됩니다. 일도 생각도 사람도 다 저만치 두고. 가끔 느릿느릿, 아니 아주 게으르게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를 ‘불온한 게으름’이라 해야겠지요. 아니 ‘꼭 필요한 게으름’이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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