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편 : 조정권 시인의 '고요로의 초대'
@. 오늘은 조정권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고요로의 초대
조정권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먼지와 모기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 [고요로의 초대](2011년)
#. 조정권(1949년 ~ 2017년) : 서울 출신으로 1970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산정묘지]로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시집으로 한국 시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받음
<함께 나누기>
오래전 지리산 쌍계사에서 3박4일 '템플스테이'와 포항시 오천읍에 있는 '갈평 피정의 집'에서 2박3일 피정을 했습니다. 템플스테이는 불교, 피정은 천주교 수련 과정의 하나입니다. 둘의 종교는 달라도 공통점은 나를 고요 속에 두고 나의 내면을 살펴보아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일일 겁니다.
저는 여행을 가도 조용한 곳으로 가지 사람이 들끓는 곳은 싫어합니다. 이름난 '~~꽃 축제장'은 안 갑니다. 한두 송이 피어 있는 꽃은 찾지만. 여름 바다를 찾진 않아도 겨울 바다는 꼭 찾습니다. 사람이 없으니 파도소리가 요란할 텐데 희한하게도 고요가 파도를 덮어 정말 조용합니다.
오늘 시에서 누군가 우리를 고요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시인이 상상하여 만든 집이지만 다시 보면 우리 내면의 집이기도 합니다. 고요의 집에 들어서면 잔디가 잘 자라고 있는데 피해 지나는 대신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그럼 돌벽 담쟁이넝쿨이 반깁니다.
맞이하는 주인도 하인도 없지만 고요가 마중 나옵니다. 어쩌면 손님이 가장 바라는 주인일지도 모릅니다. 집 안에 들어서면 벽난로와 장작이 보이고,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와, 찬장에는 그리스 옛날 문양이 새겨진 그릇이 보입니다.
방에 들어서면 바람에 가랑잎이라도 들어오도록 문과 커튼과 창을 활짝 열어젖혀야 합니다. 그래야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되니까요. 신기한 건 초대하는 이와 초대받는 이가 하나라는 점입니다. 사람과 집기 모두 낡은 것들끼리 어울려 평화로운 집. 잘 익은 적막이 '쉬세요' '쉬세요' 하며 우리를 초대하는 집.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 그 헐벗은 두 손도”
현대를 사는 우리 대부분은 머리가 무겁습니다. 살기 위해서, 남보다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다 보니 머리가 무겁습니다. 우리의 손도 거칠어졌습니다. 남과 동반성장을 위해 일한 게 아니라 오직 나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다 보니 무척 손이 거칠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요의 집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비록 적막만이 맞이하지만 전혀 심심하지 않습니다. 장작과 달빛과 먼지가 작은 잔치를 벌이고 열린 창문으로는 모기 손님 낙엽 손님도 편안히 드나드는 그런 곳이니까요.
고요는 욕망을 완전히 비운 뒤에야 찾아옵니다. 뭔가를 바라고 뭔가를 더 얻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고요는 들어서지 못합니다. 욕망을 비운 그 자리에만 고요가 소리 없이 들어섭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고요한 자연에 산다 해도 고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대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유튜브를 봐도, 모임 자리에 가도 그 일로 하여 고요가 발 붙일 틈을 주지 않습니다. 정치는 당연히 시끄럽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정치는. 나를 버림이 아니라 남의 것까지 빼앗아 내것으로 만듦이 본연의 사명이 되었으니...
누군가 고요는 가난과 비례한다고 했습니다. 가진 게 적을수록 좀 더 채우려 할 것 같은데, 실제론 현재의 상태보다 조금만 나이지기를 바랄 뿐이랍니다. 거꾸로 가진 게 많으면 더 이상 필요할 게 없을 듯하지만 사실은 더욱더 많은 걸 노린답니다. 그러니 부유할수록 고요완 멀어집니다.
앞에서 템플스테이나 피정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고요를 얻기 위해 굳이 외딴곳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외딴곳이라 하더라도 욕심을 비워내지 않으면 고요는 없을 테고, 비행장 근처 살아도 욕심을 버리면 고요는 절로 찾아올 테니까요.
*. 첫째 사진은 지리산 '삼불사'이며, 둘째는 가톨릭 배론성지 내 '성요셉 신학당'유적지인데, 고요의 이미지를 잘 살린다고 보아 구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