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편 : 임영조 시인의 '물'
@. 오늘은 임영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물
임영조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생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 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 [갈대는 배후가 없다](1992년)
#. 임영조 시인(1943~2003년) : 충남 보령 출신으로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제9회 ‘소월시문학상’을 받았으며, 시 쓰기 위해 직장을 버리고 전업시인으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남
<함께 나누기>
‘물’을 글감으로 한 시가 꽤 됩니다. 그 가운데 제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시가, “물이 물을 껴안고 간다 / 불쌍한 맨몸끼리 껴안고 흐르는 / 물과 물들을 본다”로 시작하는 이정우 신부 시인이 쓴 「물ㆍ1」입니다.
오늘 시는 위 시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릅니다. 이 신부님 시가 물과 물이 껴안고 간다 한데 비하여, 임 시인은 내가 물에 섞이고 싶다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앞 시가 물과 물의 껴안음 노래했다면 뒤 시는 나와 물의 섞임을 노래했지요.
“무조건 섞이고 싶다 /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어떤 넓고 큰 강이든 처음 시작은 작은 샘 아니면 작은 개울에서 출발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엔 강이 될 줄 몰랐습니다. 개울에서 출발한 물은 상선약수(上善若水 : 최고의 선은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감)처럼 내려오다 이 물 저 물과 합쳐져 점점 강의 모습 갖춥니다.
그런 강물처럼 화자도 물에 섞이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과 섞여 살고 싶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홀로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야 함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람은 홀로도 아름답지만 어울리면 더욱 경이 그 자체이니까요.
“더 깊게 /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개울이 내려오다가 제법 강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 물은 더 깊고 더 낮은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낮다는 말은 낮은 곳으로 무게중심을 둔다는 뜻이겠지요. 화자도 물처럼 깊고 낮게 살고자 합니다. 사람과 어울리면서 삶의 폭을 넓히고 사상의 깊이 또한 깊어지려고.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흐르다 흐르다가 물은 또 다른 물을 품습니다. 이젠 누가 봐도 완전한 강의 모습입니다. 비로소 곁눈질해도 좋은 만큼 커졌습니다. 이런저런 사람과 부대끼며 살다가 맹물 같이 잡티 섞이지 않는 순수한 여인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화자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그런 여자랑 살 수 있다면 비록 짜디짠 세상이라도 후회하지 않을 터.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살면서 온갖 잡념도 풀어보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어보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밍밍하게 살아온 삶을 하나둘 지우며. 그대와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외로운 섬 하나, 그 섬은 비록 짠내와 고독이 절절할지라도 맹물 같은 사람들이 살고자 하는 곳입니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 문득 그대 잠 깬 마을에 / 비가 되어 만날까 / 눈이 되어 만날까”
좋은 사람과 함께 살며 이룩한 삶의 터전, 영원하게 피어 있을 줄 알았던 꽃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가듯이 우리 둘의 사랑도 희미하게 옅어져 갈 날 있을 겁니다. 그대쪽보다 내쪽에서의 문제겠지만 나는 그대를 믿습니다. 비가 되어 눈이 되어 다시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까요. 우리는 영혼조차 한 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허나 아닙니다. 나 혼자만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지... 그대 입장보다 나만 생각하며 살아온 게 아닌지. 그대에게 맞추기보다 나에게 맞추기만 강요한 삶이 아닌지. 물처럼 스스로 몸을 낮추어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그대 마음 채워주려 했건만 그건 생각뿐. 그저 생각뿐이었습니다.
물은 만물을 적셔서 생명을 누리게 하고서도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말없이 흐르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그 고마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냥 흐르는 대로 따라가면 되었건만.
시인은 우리에게 어설픈 곁눈질 대신 우리도 오늘 아침 물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하나가 되어 봄이 어떠냐고 묻고 있습니다.
*. 제가 20년 넘게 시 배달을 해왔습니다만 제 해설이 마음 안 들 때마다 하는 말,
"제 해설은 시를 제대로 파악한 게 아니라 제 기분에 든 대로 풀이했으니 다만 참고로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