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26)

제326편 : 성금숙 시인의 '풀'

@. 오늘은 성금숙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성금숙

무서운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몰려다니는 것이다
퍼트리는 것이다
나를 지우는 것이다
깊숙한 곳으로 뻗는 질긴 뿌리들
까맣게 잊혀도 괜찮겠니,
팽나무 아래서
홑겹 같은 혼자를 밥상처럼 놓고 앉아
그늘의 뼈를 맞추며
중얼거리다가
호미처럼 서러워진 적 있다
- [하루는 몇 층입니까](2025년)

#. 성금숙 시인(1964년생) : 충남 부여 출신으로 2017년 계간 [시산맥]을 통해 등단. 53세의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올해 첫 시집을 냈는데, 알차고 깊이 있는 시를 쓴다는 평을 들음.


(흔하디 흔한 잡초이지만 애기똥풀꽃이란 고운 이름을 지님)


<함께 나누기>

‘풀’을 글감으로 한 시 하면 단박에 김수영 시인의 「풀」이 떠오를 겁니다.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가 없는. 풀은 강한 바람에 쓰러지지만 결코 그대로 누워 있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강한 의지를 풀에 감정이입하여 표현한 시이지요.
김수영 시인 말고도 김지하의 「풀에도 남북이 있는가」, 김종해 시인의 「풀」도 꽤 알려진 시입니다. 성금숙 시인의 시는 조금 다릅니다. 풀 하나하나는 참 보잘것없고 힘도 없지만 무리 지어 살기에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는 식으로.

시로 들어갑니다.

“무서운 것은 / 움직이는 것이다 / 몰려다니는 것이다 / 퍼트리는 것이다 / 나를 지우는 것이다”

풀의 무서운(강한) 점을 네 가지로 나열해 놓았습니다. 움직이고, 몰려다니고, 퍼뜨리고, 나를 지우고. 풀을 잡초로 보면 움직인다를 ‘잘 자란다’로, 몰려다닌다를 ‘떼 지어 핀다’로, 퍼뜨린다를 ‘번식력이 강하다’로 새기면 되겠지요.
헌데 네 번째 ‘나를 지우다’는 무슨 뜻일까요? 우선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 즉 무리 속에 들어 무리에 묻혀 살 뿐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로. 다음으론 스스로 자신을 지우는 게 아니라 다른 이가 볼 때 존재 의미가 너무 희미하여 지워진 존재나 같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풀을 정리하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홀로가 아닌 여럿이 떼 지어 살고, 번식력이 아주 강하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무리의 일원이 되어 그 무리가 잘되도록 바라는 존재가 바로 풀이라고.

“깊숙한 곳으로 뻗는 질긴 뿌리들 / 까맣게 잊혀도 괜찮겠니”

풀, 즉 잡초를 제거하기 힘든 까닭은 뿌리가 땅 깊이 박혀있거나 얕더라도 여기저기 발을 뻗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풀을 볼 때 겉으로 드러난 면만 보는데 실제 그 뿌리를 보지 않고서 마치 풀의 속성을 다 아는 양 떠들어댑니다. 풀의 뿌리는 다른 어떤 면보다 더 무섭고, 더 강하며, 더 억셉니다. 그럼에도 그걸 우린 잊고 삽니다.
여기쯤 오면 풀은 둘로 나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겉의 모습과 보이지 않으나 풀의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 한쪽은 여러 가치를 지니나 다른 한쪽은 잊혀지고.

“홑겹 같은 혼자를 밥상처럼 놓고 앉아 / 그늘의 뼈를 맞추며 / 중얼거리다가 / 호미처럼 서러워진 적 있다”

화자는 오래된 팽나무 아래서 앉아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여기서 ‘홑겹 같은 혼자를 밥상처럼 놓고 앉아’란 시행을 봅니다. 참 비유가 찰지지요. 외로움을 극대화한 이런 참신한 비유 한 번 본 사실만으로도 이 시는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 왜 호미처럼 서러울까요? 호미를 갖고 일하다 끝낼 무렵 다른 연장은 다 챙기는데 호미만은 그냥 밭에 버려둘 경우가 많습니다. 호미 입장에선 잊혀진 존재가 돼 버립니다. 화자도 무리 속의 일원이나 가끔 호미처럼 지워진 존재인 양 서러움을 느낀다는 식으로 풀어봅니다.


오늘 직장 가는 길이나 소일거리 찾아 가는 길에 잠시 눈을 아래로 돌려봅시다. 풀이 보일 겁니다. 무리의 힘, 자신을 지워 하나로 몰려다니게 만드는 힘, 비록 개개의 이름은 몰라도 뿌리내려 사는 풀들을 생각하는 시간 가져봄이 어떨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