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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27)

제327편 : 박정대 시인의 '되돌릴 수 없는 것들'

@. 오늘은 박정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
박정대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이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2007년)

#. 박정대 시인(1965년생) :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199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제19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시 쓰기 위해 뛰쳐나왔으며, ‘기인’이라 불릴 정도로 자유분방한 감성의 소유자.
‘밥 딜런’의 노래와 ‘장만옥’과 ‘등려군’의 영화와 노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체 게바라’와 ‘카뮈’를 좋아하여 시의 글감으로 자주 활용함.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의 [밀짚모자를 쓴 소년]



<함께 나누기>

한 시인의 시가 해마다 되풀이 배달됩니다. 일 년에 대략 210편쯤 시를 올리는데 가끔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시인의 순서는 정해져 있는데 그 계절에 맞지 않는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났을 때. 그렇다고 시인을 계절에 맞게 뒤로 미뤘다간 빠뜨리기 십상. 박정대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데 오늘 「되돌릴 수 없는 것들」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이 시는 가을에 읽으면 참 좋은데...

시로 들어갑니다.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미국의 저명 저술가 윌리엄 진서는 '어떤 글에서건 가장 중요한 문장은 맨 처음 문장이다. 첫 문장이 독자를 둘째 문장으로 끌고 가지 못하면 그 글은 죽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첫 문장에서 독자를 사로잡은 글은 독자의 손에 오래도록 안긴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시를 그런 면에서 보면 완전 대성공입니다.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이 시구 대하는 순간 책상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습니다. 나의 쓸쓸함이 어떤 특정 원인이나 사건에 의해 시작되었거나, 어떤 이유로 생겨났다는 설명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이 쓸쓸함이 갑자기 나타났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무언가로 느껴진다는 의미로.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너의 얼굴이 그리워 손을 내밀면 너의 얼굴 대신 가을이 만져지다가 부서진다? 떠오르는 첫 생각은 ‘너랑 오랫적 사랑했다 지금은 이별 상태에 있구나’입니다. 가을날 너랑 얽힌 추억이나 감성을 손에 쥐려 하다 그것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빠르게 사라져 버리는 덧없음을 표현함인가...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쉽게 부서지는’을 ‘~ 잊혀지는’으로 바꿔봅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잊을 수밖에 없다면 어떨까요? 우리 대부분은 한 번쯤 그런 경험 있을 겁니다. 영원히 심장과 더불어 뛸 것만 같은 추억이었건만 그놈의 삶이 뭔지 그렇게 뒷전에 밀어두다가 잊혀진.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아득한 시간, 함께 밟고 간 길에서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봅니다. 네 그림자엔 어두워져 가는 내 생각이 담겼습니다. ‘어둠’과 ‘저녁’, 이로 보아 내 생각이 어떤지 짐작이 가시지요. 영원할 줄 알았건만 영원하지 않았기에 어두운.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이어 썼을 겁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라고.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가을에서 겨울 함박눈이 내리는 계절로 이어질 때까지 내 삶의 안쪽에선 그대 생각을 합니다. 허나 생각뿐, 그저 바라만 볼 뿐. 잊고 있다가 어떤 연유로 가끔 생각날 뿐, 내겐 다음이 없습니다.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 기원이 없이 쓸쓸하다 /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같은 시행의 반복인가 넘어가려는데 묘하게 꼬아놓은 시구가 보입니다. ‘기원이 없이 쓸쓸하다’와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전자가 ‘처음부터 기원이 없이 시작되어 쓸쓸하다’라면, 후자는 ‘기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라는 뜻입니다. 기원이 없는 사랑, 그러면 나의 온 생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립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만이 느끼는 그 쓸쓸함.

문득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란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 이 세상도 끝나고 /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 그 빛을 잃어버려”

*. 붙인 노래는 양희은이 부른 '사랑, 그~~'입니다.

https://youtube.com/watch?v=eZFh8erJbuk&si=y7TsFmoPGXO-5pkJ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양 희은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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