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 신내이, 쓴냉이, 씀바귀
* 신내이, 쓴냉이, 씀바귀 *
열 명이 한 배에서 태어났다가 얼마 전 큰 누님이 하늘로 가시고 둘째와 셋째 누님, 그리고 저. 이렇게 우리 형제는 셋만 남았습니다. 누가 먼저 불려 갈진 하느님 손에 맡긴 터. 작년 이맘때쯤인가 둘째 누님이 다시 아파 병원에 드나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자주 병원 드나들던 차라 또 그렇거니 했는데 이번엔 다르다는 조카 말에 우선 전화부터 걸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누나 머 묵고 싶노?” 했더니, 사실 대답은 기대 안 했습니다. ‘묵고 싶은 기 머 있겄노.’로 답할 게 뻔해서. 어, 그런데 천만뜻밖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습니다. “내사 마... 인자 신내이김치나 묵고 갔으면 여한이 없겠다.”
갑자기 먹먹해졌습니다. ‘신내이' 달리 '신냉이, 쓴냉이, 씀바귀'라고 하는데, '신내이김치’에 얽힌 사연을 오래전 누나에게 들었기 때문이지요. 누나는 결혼 초 생계에 도움되고자 시장에서 양푼 그릇(음식을 담거나 데우는 데에 쓰는 놋그릇)을 팔았는데 누가 귀띔했는가 봅니다. 시골 가면 몇 배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다고.
귀가 얇아선지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겨선지 누나는 도매상에 가 빚을 내 양푼 그릇 한 보따리를 사 진주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목적지는 바로 경남 산청군 덕산면 문암리와 중태리. 그곳은 울엄마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엄마 택호가 ‘문암띠’)
거기 가면 이모가 살고 이종오빠와 이종언니가 사니 잠잘 곳은 염려 않아도 될 터. 그런 이점 말고 또 있었습니다. 지리산 바로 밑 오지라 도시에서 팔러오는 장사치가 없으니 가까운 덕산장에 가 팔면 되리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돈을 벌었는지 밑천 다 까먹었는지 모릅니다만 갔다 오면 늘 하는 말, “이모 집에 갔더니 신내이김치가 올매나 맛있던지...” ‘신내이김치’란 말을 들었어도 그땐 인터넷도 없을 때고, 사전에도 실리지 않은 말이라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그런데 오십 년이 지난 작년 다시 ‘신내이김치’란 말을 들었으니. 당시 할 수만 있다면 신내이 잔뜩 캐서 김치 담아 갖다 드리고 싶었는데... 김치 장인 아내가 몸 상태가 좋지 않고, 뒤져 보니 인터넷엔 실렸어도 제 능력 밖이라 포기했는데...
글벗님들은 신내이든 쓴냉이든 신냉이든 그런 이름을 듣지 못해도 ‘씀바귀’란 풀 이름은 들었을 겁니다. 혹 고교 때 배운 송강 정철의 시조, “쓴나물 데온 물이 고기도곤(~보다) 맛이 있어”를 기억하실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쓴나물’을 자습서에선 ‘맛이 쓴 나물’로 풀이하고 있는데, 사실은 '씀바귀'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또 「봄맞이 가자」란 동요에도 씀바귀가 나오지요.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씀바귀는 잎과 뿌리에서 나오는 하얀 즙이 ‘쓰다’ 해서 붙은 이름인데, 혹 씀바귀의 어원이 궁금하실 분을 위해 덧붙입니다. 씀바귀는 ‘씀 + 바귀’로 나뉘는데 ‘씀’은 ‘쓴’의 우리말 고어(古語)이고, ‘바귀’는 나물이나 풀 이름 뒤에 붙는 접미사입니다. (다른 의견도 있음)
혹 씀바귀를 고들빼기와 혼동하시는 분도 계시리라 여깁니다. 꽃도 잎도 비슷한데다 뿌리를 김치로 담아 먹는다는 점에서 같으니까요. 허나 둘은 조금 다릅니다. 우선 고들빼기는 꽃술이 꽃잎과 같은 색이나 씀바귀는 꽃술이 검습니다.
다음으로 고들빼기는 잎끝이 뾰족하고 잎이 줄기를 감싸고 있는데, 씀바귀는 잎이 둥글고 잎이 줄기에 별도로 붙어 있습니다. 글로 쓰면 둘의 비교가 쉬우나 사실 고들빼기나 씀바귀에 익숙한 시골 사람 아니면 실제로 보면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고들빼기김치'는 먹어봤어도 '신내이김치'는 잘 모르시는 분들이 꽤 될 겁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김치 대부분은 고들빼기김치니까요. 그렇지만 신내이김치(씀바귀김치)에 맛들이면 고들빼기김치보다 더 맛난다고 합니다. 둘째 누님이 “택도 없다, 어딜 비교한다고!” 하시니까요.
사실 씀바귀를 글감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그래서 좋은 점과 추억 어린 얘기를 담고 있지만 시골 사는 이에게 씀바귀는 참 애물단지입니다. 이리 말하면 퍼뜩 눈치채셨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김치 담글 때 말고는 잡초로 온 밭을 뒤덮어 워낙 성가시게 굴어야 말이지요.
밭에 씀바귀가 들어오면 그 밭을 작살냅니다. 한두 뿌리야 뽑아버리면 되지만 단 한 뿌리만 살아도 주변을 씀바귀 세상으로 만듭니다. 이처럼 생명력이 좋은 씀바귀 같은 잡초는 또 약성(藥性)이 뛰어나다고 하지요. 당연히 허준 선생이 지은 [동의보감]에도 나오구요.
지금 우리 밭 주변에는 씀바귀꽃이 노란 꽃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니 시골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머무는 언양 주변 길가도 온통 노란빛입니다. 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라면 빈터나 고수부지에 작은 노란 꽃이 보인다면 애기똥풀꽃 아니면 씀바귀꽃입니다. 아마 사진 보신 분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일 터.
천대받는 잡초를 먹거리로 만든 우리 선조들의 지혜, 특히 잎과 뿌리 둘 다 이용해 만드는 민들레김치, 고들빼기김치, 신내이김치... 이 삼총사는 밭에선 밉상이건만 환골탈태하여 우리 앞에 섰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미워할 건 없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다시 씀바귀꽃 봅니다. 참 이쁩니다. 하기야 꽃치고 이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리오. 저를 보기만 하면 웃으니 뽑을 생각을 버리게 만듭니다. 밭을 온통 잡초로 뒤덮어 미워하고 싶은데 눈을 아래로 내리면 활짝 노란 웃음 짓고 있으니 어쩝니까. 참 꽃은 요물입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