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편 : 고경숙 시인의 '이모'
@. 오늘은 고경숙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이모
고경숙
엄마가 벗어놓고 간 치맛자락에서
내 울음 몇 조각 주워들고
이모 손에 이끌려 유치원에 갑니다.
주머니에 넣어 온 그 울음조각 만지작거리는데
이모가 손을 잡아끌며 재촉합니다.
우리들은 종일 놉니다.
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엄마와 닮지 않은 이모들이
데리러 오나 내다보며
저녁이면 퇴근하는 이모
내 빠이빠이가 이모를 보내고
소파에 앉으면
이모가 벗어놓고 간 앞치마에
내 울음조각 또 몇 개 묻어 있습니다.
- [혈을 짚다](2013년)
#. 고경숙 시인(1961년생) : 서울 출신으로, 2001년 계간 [시현실]을 통해 등단. 현재 부천에 살면서 부천 시문학계를 이끌며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열심히 생활함
<함께 나누기>
'이모',
엄마의 자매를 가리키는 이 말이 요즘 들어 각광받고(?) 있습니다. 엄마가 자기 친구를 아이에게 소개할 때 이모라고 부르게 합니다. 또 식당에 가 자리 안내하고 음식 갖다 나르는 여인을 부를 때 한두 번 다 ‘이모!’ 하고 불러보았을 터.
그래선지 구인 구직 광고에 주방 이모, 김밥집 이모, 횟집 이모 등 ‘OO 이모’를 찾는 글귀가 나돌아다닙니다. 헌데 오늘 시를 읽으니 엄마를 대신하여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소위 ‘육아 도우미’를 가리키는 호칭도 이모라 하는군요.
시로 들어갑니다. 사실 이 시는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쉬 이해될 겁니다.
“엄마가 벗어놓고 간 치맛자락에서 / 내 울음 몇 조각 주워들고 / 이모 손에 이끌려 유치원에 갑니다”
화자를 아이로 바꿔놓았습니다. 즉 아이의 시각에서 썼다는 말입니다. 동시와는 다릅니다. 시각만 아이로 바꾸었을 뿐 어른을 대상으로 했으니까요. 이 시구 읽자마자 맞벌이 부부의 눈에 이슬이 맺힐 겁니다. 혹 직장 나가는 딸과 며느리를 둔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주를 생각하며...
일찍 출근한 엄마가 벗어놓고 간 치맛자락엔 아이를 끝까지 챙기지 못한 엄마의 눈물이 담겨 있는데 거기에 아이의 울음까지 더해집니다. 두 눈물이 합쳐진 채 아이는 소위 육아 도우미라는 이모의 손에 이끌려 유치원으로 갑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기며.
“엄마와 닮지 않은 이모들이 / 데리러 오나 내다보며”
‘엄마와 닮지 않은 이모’란 표현에 슬며시 미소 짓다가 다시 서글픔이 치밉니다. 그렇지요, 자매라면 닮아야 할 텐데 전혀 닮지 않은 이모니까요. 그런데 고모도 있는데 왜 하필 이모란 호칭을 붙였을까요? 친가보다 외가를 더 가깝게 여기는 요즘 추세를 반영해 고모보다 이모가 조금 더 편하게 느껴져서랍니다.
“저녁이면 퇴근하는 이모 / 내 빠이빠이가 이모를 보내고 / 소파에 앉으면”
이모의 근무시간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대목입니다. 엄마가 출근하기 직전에 와 아이 유치원 등하교까지 도와주다가 엄마가 오는 저녁이면 돌아가는. 친할머니 혹은 외할머니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니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이모가 벗어놓고 간 앞치마에 / 내 울음조각 또 몇 개 묻어 있습니다”
첫 시행에서 이슬 머금게 하더니 마지막 시행에선 흘리게 만듭니다. ‘이모가 벗어놓고 간 앞치마에 울음조각 몇 개가 묻어 있다’는 표현, ‘역시 시인은!’ 하고 감탄을 터뜨리게 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아이들의 울음 조각이 그 앞치마에 묻어나겠지요.
갑자기 이 시 읽고 나니 외손녀 둘과 친손자 하나를 딸과 며느리가 다 알아서 잘 키우겠지 했는데 우리 부부의 손이 더해져야 함을 느낍니다. 부르면 서울이든 어디든 달려가야 하는데... 물론 가도 저보다 아내가 애쓰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 첫째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으며, 둘째는 시의 분위기가 좀 어두운 것 같아 일부러 밝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이젠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된 외손녀 둘의 어린이집 다닐 때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