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편 : 손택수 시인의 '뼈아픈 우화'
@. 오늘은 손택수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뼈아픈 우화
손택수
그 많은 하루살이들의 이름에 나는 놀란다
우리나라에만 무려 80여 종
오래 살 궁리를 하다 천적의 먹이나 되지는 않겠다고,
자자손손 먹고사는 일로 등골이 휘어지지도 않겠다고
입을 아예 봉해버린 그들이다
배에서 가슴팍까지 알을 품기 위해
하나라도 더 빽빽하게 채우기 위해
소화기관까지 다 비워버린 하루살이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산 생물 중 하나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 종만 2,000여 종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가 무한을 누린다
한 번도 절정이 온 적이 없는 자여
절정이 두려워 권태로운 양생의 탐욕에 빠져 사는 자여
수십억 년의 길이를 가진 하루를 살아보았는가
모든 의지를 발화점에 모은 뒤 스러져가는
번식의 군무를 보라 찰나를 생명의 소명으로
저물녘 여울에서 하루살이가 끓는다
아기들을 기다리며 아기들을 수출하는
인구절벽 시대의 뼈아픈 우화다
- 계간 [가히](2024년 봄호)
#. 손택수 시인(1970년생) : 전남 담양 출신이나 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20011년부터 3년간 [실천문학사] 대표로 있다가 사직한 뒤 ‘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음.
<함께 나누기>
인터넷을 뒤지니 하루살이의 종류가 무려 2500여 종이요, 우리나라에만 80여 종이 산다고 합니다. 하루살이면 다 하루만 살겠거니 해서 고작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벌레에 붙은 이름이 이리도 다양할 줄이야.
시를 쓰려면 철학자의 깊이 있는 사유와, 과학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담담히 그려내는 수묵화가가 되어야 함을 오늘 시를 통해 다시 깨닫습니다. 하루살이가 입을 아예 봉해버렸고, 소화기관까지 다 비워버렸다(퇴화)는 사실은 이 시 읽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터.
시로 들어갑니다.
“그 많은 하루살이들의 이름에 나는 놀란다”
전 세계에 2500여 종, 우리나라에만 무려 80여 종이 사니 당연히 2500여 개 이름이 딸린다는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전 세계 고양이 종류가 70여 종이라니까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세상에 하루살이 종류가 고양이 종류보다 많다니. (마릿수야 당연히 많지만)
“입을 아예 봉해버린 그들이다”
시에서는 하루살이가 입을 봉해버린 (입이 없어진) 까닭을 ‘천적의 먹이 되지 않겠다고, 먹고사는 일로 등골이 휘어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붙입니다. 실제 성충이 되면 하루살이는 ‘입’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유충 시절엔 입이 있어 먹이를 먹고살지만, 성충이 되면 입이 퇴화되어 먹이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겨우 수분만 섭취 가능한 수준이니 하루살이는 먹지 못해 죽는답니다. (먹지 못하니까 잘해야 이틀, 아니면 하루 안에 끝나는 삶이라 하루살이가 됨)
“소화기관까지 다 비워버린 하루살이”
시에서는 ‘배에서 가슴팍까지 알을 품어 하나라도 더 빽빽하게 채우기 위해’ 소화기관까지 다 비워버렸다 했지만 실제완 다릅니다. 하루살이는 유충(애벌레)일 땐 소화기관이 있지만 성충은 소화기관 없습니다. 입과 소화기관이 퇴화되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짝짓기에만 집중하여 번식에만 힘쓴다고 합니다.
시인은 하루살이의 입과 소화기관 퇴화된 까닭을 사실과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그럼 몰라서? 시 쓰기 위해 자료 찾아 공부했는데도? 사실대로 쓰는 것보다 시적으로 형상화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시와 과학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시는 사실보다 읽는 이에게 다가갈 표현이 중요하기에.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가 무한을 누린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입과 소화기관이 없어질 때까지 즉 삶의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하루살이가 고작 하루 사는데 무한을 누린다?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삶의 최소 시간이 아니라 최대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자손 번식을 위해 살았으니 무한의 삶이 되는 것이지요.
“수십억 년의 길이를 가진 하루를 살아보았는가”
한 번도 절정을 맛본 적이 없고 절정이 두려워 권태로운 양생의 탐욕에 빠져 사는 사람은 진정한 하루의 시간을 모릅니다.
불교 설화를 보면 ‘아승기 전세’란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숫자로 환산하면 10의 50제곱이라 하던가. 그 오래전에 만난 전세의 인연이 아승기 전세입니다. 그 많은 시간의 인연도 찰나(1/75초)에 지나지 않음을 우린 압니다.
“아기들을 기다리며 아기들을 수출하는 / 인구절벽 시대의 뼈아픈 우화다”
이 시를 읽어야 함을 보여주는 시행입니다. 단순히 하루살이 일화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경구(驚句)를 들이밉니다. 하루살이는 모든 의지를 발화점에 모은 뒤 번식의 군무를 춥니다. 찰나를 생명의 소명으로 여기며 저물녘 여울에서 정염(情炎)을 불태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실은 어떻지요? 부끄럽게도 6·25 전쟁 직후부터 지금껏 약 20만 명을 국외로 내보낸 ‘세계 최대 아동 수출국’입니다. 그러면서 신문마다 TV마다 우리나라는 저출산 국가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얼마 안 되는(?) 아기조차 지키지 못하건만.
그러니까 우화입니다. 아시다시피 우화는 생물이나 사물을 의인화시켜 교훈을 주는 이야기지요. 하루살이라는 미물을 끌어와 슬쩍 저출산 현실을 비웃습니다. 시 제목이 「뼈아픈 우화」가 된 까닭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