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편 : 최정례 시인의 '장마와 입술'
@. 오늘은 최정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장마와 입술
최정례
비가 퍼붓고 있었다.
비가 수백만 개의 발을 내던지고 있었다.
생각 없이 퍼부어 대고 있었다.
신호등 앞인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빗속에 수십 년간 갇힌 것 같았다.
신호등의 불빛이 날카롭게 산란하며 칼날을 그어댔다.
그 여름도 이런 장마 통이었다.
광포하게 퍼붓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우산을 쓰고 깁스한 발에는 슬리퍼를 꿰어 신고 다른 한쪽에는 젖은 구두를 신고 왔다.
“아니 그 발을 하고 이 빗속을 왜?”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살폈고 서로 젖은 얼굴과 산발한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그 무렵 우리의 말은 늘 적절하지 않았다.
서로를 찢는 어리석은 말들을 내던지고 후회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헤어졌다.
기억나는 것은 우산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이 내 입술 가까이에 있었던 것.
눈도 눈썹도 검은 꽃잎처럼 껌뻑이고 있었고, 그의 손등이 내 입술에 닿을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았다.
홍수가 나고 돼지가 떠내려가고 맨홀에 갇혀 누군가 죽어 나가는데도 입술 근처의 감각은 유실되지 않았다.
오만 가지 생각과 결합하려고 거품처럼 떠오르다가도 어디 가닿지 못하고 국지성 호우 속에 갇혀 있었다.
- [개천은 용의 홈타운](2015년)
#. 최정례 시인(1955년 ~ 2021년) :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2020년 11월 투병 중에 [빛그물] 시집을 펴낸 뒤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2021년 1월에 하늘로 가심.
<함께 나누기>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장마와 입술 둘을 어떻게 엮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먼저 일었습니다. 둘은 언뜻 봐선 연결고리가 없으니까요. 다 읽고 나선 역시 시인이란! 하는 찬사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전혀 엉뚱한 둘을 날줄과 씨줄 엮듯이 정교하게 꿰맸으니까.
우선 위 시는 행과 연의 구별이 없는 산문시인데, 제가 임의로 4연으로 쪼갠 뒤 각 연에 맞도록 행을 다시 쪼갰습니다. 사실 이런 작업은 시인이 싫어할 일입니다만 해설하는 입장에선 이렇게 하지 않고선 풀이가 쉽지 않기에 부득이하게...
시로 들어갑니다.
"비가 퍼붓고 있었다. 비가 수백만 개의 발을 내던지고 있었다. 생각 없이 퍼부어 대고 있었다."
굳이 장마철이 아니라도 하늘이 구멍난 듯 비가 억수로 퍼부을 경우가 종종이지요.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수백만 개의 발을 내던지고'란 시구를 봅니다. 빗줄기의 모습이 눈에 생생히 담깁니다. '빗발치다'처럼 '비의 발'이란 표현은 더러 보았지만 이 시구는 오롯이 시인의 창조물...
"갑자기 그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우산을 쓰고 깁스한 발에는 슬리퍼를 꿰어 신고 다른 한쪽에는 젖은 구두를 신고 왔다"
이제 여성 화자에게 사귀는 사내가 등장합니다. 비 오는 날 깁스 한 채 우산 쓰고 깁스 한 다리에는 슬리퍼 신은 채. 다리 불편할 때는 빗속을 와선 안 됩니다. 헌데 그가 왔습니다. 왜? 쉽게 생각하면 화자가 그리워서 그런 차림으로 왔다고 볼 수 있겠고, 다른 면에선 꼭 전할 말이 있어서라고.
"그 무렵 우리의 말은 늘 적절하지 않았다 / 서로를 찢는 어리석은 말들을 내던지고 후회로 가득 채웠다."
둘의 관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서로가 하는 말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그리 말하고선 이내 후회하지만 다시 또 상대를 아프게 하는. 이러면 필연적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굳이 비 오는 날 오지 않아도 되련만. 서로에게 상처 주는 사이라면... 헤어져야 하겠지요.
"기억나는 것은 우산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이 내 입술 가까이에 있었던 것"
둘이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도 도로 회복할 기회가 왔습니다. 그의 손등에 입술을 댔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그리 했더라면. 이제 [장마와 입술]이란 제목이 준 궁금증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둘의 행위에 속터질 지경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해와 배려의 마음은 일절 없는지.
"오만 가지 생각과 결합하려고 거품처럼 떠오르다가도 어디 가닿지 못하고 국지성 호우 속에 갇혀 있었다"
화자는 아직 입술 근처의 감각을 잊지 못합니다. 그 감각은 유실되지 않았습니다. 닿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 남았습니다. 사랑은 국지성 호우처럼 한순간 세차게 가슴을 치고 또 쳐야 합니다. 뜨뜻미지근한 자세론 갈등만 부추길 뿐입니다.
사랑은 아무러한 생각 없이 퍼부어 대는, 그리하여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빗속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여야 합니다. 비록 다리에 깁스를 했어도, 한 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서라도 만나러 오는, 억수같이 퍼붓는 빗발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달려오는, 그게 사랑 아닐까요?
사랑, 참 쉬운데 왜 이리도 어려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