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3편 : 문인수 시인의 '각축'
@. 오늘은 문인수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각축
문인수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 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 [쉬!](문학동네, 2006)
#. 문인수 시인(1945년 ~ 2021년) : 경북 성주 출신으로 마흔한 살의 나이에 1985년 [심상]을 통해 등단. “입학이 늦었으니 졸업도 늦게 해야죠.”란 말대로 왕성하게 작품활동 하시다가 2021년에 돌아가심.
<함께 나누기>
인간 아닌 의식 있는 제3의 존재가 있어 인간과 다른 동물을 비교 관찰해 본다면 자신의 판단을 그르치게 된답니다. 왜냐면 사람의 초기 모습은 참으로 보잘것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태어나 적어도 십 년은 지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초원의 영양은 태어난 지 1시간 안에 일어서 걷습니다. 덩치가 우리보다 큰 하마, 기린, 코끼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에 비해 어떻습니까. 적어도 일 년이란 기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이 다른 동물들은 새끼까지 낳건만.
또한 초식동물이 스스로 풀을 뜯어 먹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하루 이틀 정도인데, 이에 비해 우리 스스로 먹거리 챙길 수 있는 나이는 몇인지. 그러니 제3의 존재가 인간과 다른 동물을 적어도 십여 년 이상 관찰하지 않고선 인간이 다른 동물을 제압하고 만물의 영장 됨을 상상할 수 없으니...
오늘 시에 쓰인 ‘각인’과 ‘각축’ 두 낱말을 봅니다.
우선 각인(刻印)은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기억을 뜻하는데, 어떤 경험이나 사건이 강렬하게 기억되어 좀처럼 잊히지 않을 때 씁니다. 다른 뜻도 있으니, 동물들이 특정 시기에 특정 대상에게 강하게 끌려 따르는 현상도 가리킵니다. 오리가 태어나 처음 본 사람을 어미로 여겨 따른다든지 하는.
각축(角逐)을 봅니다. 角逐에서 ‘角’은 뿔이요, ‘逐’은 쫓다란 뜻이니, ‘뿔이 닿을 만큼 가까이 쫓아가다’ 즉 '치열한 경쟁'의 뜻이 담겼습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에서 ‘두 팀 간 각축을 벌이다’나, 반도체 사업을 두고 ‘삼성과 SK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등에 쓰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화자가 2월 어느 날 재래시장을 찾았습니다. 이곳저곳 구경하다 한 곳에 이르니 그의 눈길 끄는 장면이 들어왔습니다.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 누구에게 팔려갈지 모르고, 또 어미와 새끼가 다 함께 같은 집에 갈지 뿔뿔이 흩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젖을 뗌직한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그러면서 상사화 잎사귀만큼 작은 뿔을 서로 맞대며(角逐) '톡 탁' '톡 탁' 끊임없이 티격태격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화자가 한 마디 거듭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끼염소의 귀여운 뿔 부딪힘(角逐 : 각축)이 그저 재미있어 철 안 들어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큰 의미 담은 놀이입니다. 즉 앞으로 어디를 가서 살든 어리고 연약한 몸으로 혼자 힘든 삶을 견뎌야 할 때를 대비한 일종의 훈련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뿔을 부딪히다 보면 제 형제의 기억을 뿔에 도장 찍듯(刻印 : 각인) 새겨 나중에 헤어졌다 하더라도 형제임을 깨달아라 하는 훈련입니다. 비록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기억을 세밀하고도 야무지게 저장해 두면 나중에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터.
형제나 자매가 함께 큰 가정이라면 형제끼리 자매끼리 서로 다투며 그리 자랐을 겁니다. 이 다툼을 우리네 부모님은 언짢게 여겼지만 그것도 우애를 다지기 위한 훈련의 하나라 하더군요.
많이 싸운 형제와 자매가 커서는 그렇지 않은 형제자매보다 더 사이가 돈독해진다고 합니다. 그때 형제자매의 싸움이 마치 장날 염소 새끼와 닮았지 않습니까. 서로의 정을 더 두텁게 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시에서 시골 장날 장터에 나온 염소 가족을 보는 화자의 눈길이 매서운 바람 부는 2월이지만 그 추위를 누를 만큼 퍽이나 따뜻해 보입니다. 뿔뿔이 팔려갈 운명에 처해 있는 염소 가족을 보며 새끼들끼리 뿔 부딪히며 노는 행위를 아주 담담히 그려낸 한 편의 좋은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