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0편 : 주경림 시인의 '삶을 해체하다'
@. 오늘은 주경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삶을 해체하다
주경림
S라인 몸매의 늘씬한 여성전신 마네킹이
노상주차장에 서 있다
마스카라 짙은 속눈썹과 분 자국이 남아있는
알몸의 너
못된 년, 너 잘 만났다 어디서부터 너를 죽여줄까
먼저, 바닥에 쓰러뜨렸다
머리를 두드려 추억을 지우자
봉긋한 가슴에서 퍽퍽 사랑이 주저앉았다
나비 모양 엉덩이에서 펜치로 고관절을 뽑았다
엉덩이 속의 나사들이 와르르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쏟아냈다
망치로 빗장뼈를 때려 팔을 떼어냈다
무릎을 꺾어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분리했다
쓰레기봉투에 담으려고 더 작게 부셨다
바짝 달겨들어 한바탕 밟고 두들겨 패고 …
50 리터 종량제봉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때, 오른손이 봉투 속에서 쑥 빠져나왔다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편 '시무외인(施無畏印)',
“두려워하지 말아라.”
- [무너짐 혹은 어울림](2021년)
#. 주경림 시인(1956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2년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 성북구에서 오랫동안 ‘성암탕’이란 목욕탕을 운영해 오다가 현재 목욕탕 문을 닫고 열심히 시를 쓴다고 함.
*. 시무외인 : 부처님이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위안을 주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는 손 모양(手印)
<함께 나누기>
작년 가을쯤 도심을 걷다 옷가게 즐비한 길에 이르러 마네킹이 부서진 채 쓰러져 놓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쓰레기로 버리려면 종량제 봉투에 넣어야 할 텐데 그대로 버려진 걸 보니 아마도 곧 처리하지 않을까 했는데.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요즘 마네킹은 특수재질로 만들어 잘 부서지지 않는다는데, 저리 박살 난 걸 보니 예전 재질로 만든 구제 마네킹인 듯. 그러니 머리 따로, 몸통 따로, 팔 따로, 다리 따로 완전해체된 상태. 그때 글감을 얻어 대충 적어놓았는데 그게 사라져 아쉽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S라인 몸매의 늘씬한 여성전신 마네킹이 / 노상주차장에 서 있다”
버스 타러 가던 화자의 눈에 주차장에 놓인 여성 마네킹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스카라 짙은 속눈썹과 분 자국이 남아있는 알몸의 마네킹. 제가 본 건 부서진 채였습니다만 시인이 본 마네킹은 제법 온전한(?) 상태였던가 봅니다.
“못된 년, 너 잘 만났다 어디서부터 너를 죽여줄까 / 먼저, 바닥에 쓰러뜨렸다”
역시 시인의 감성은 다른가 봅니다. 마네킹을 무정(無情)의 존재가 아닌 유정(有情)의 존재로 보았으니 말입니다. 이 표현으로 보면 버려진 마네킹에 대한 애틋함보다 화자의 눈에 연적(戀敵)으로 보였을까요. 나의 사랑을 빼앗아간 나쁜 여자로.
연적으로 여겨지니까 죽이고 싶고 부수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처음 머리를 두들겨 팹니다. 이어서 봉긋한 가슴에도 주먹질합니다.
시앗(남편의 첩)을 시샘하는 여인의 분노인 양 계속 이어집니다.
‘나비 모양 엉덩이에 펜치로 고관절 뽑자 엉덩이 속의 나사들이 와르르 쏟아지자 그동안 참았던 욕지거리를 마구 퍼붓습니다.’
심지어 ‘망치로 빗장뼈를 때려 팔을 떼어내고, 무릎을 꺾어 넓적다리와 정강이까지 분리합니다.’
‘쓰레기봉투에 담으려고 더 작게 부수다가 바짝 달겨들어 한바탕 밟고 두들겨 패고… 마침내 50 리터 종량제봉투에 꾹꾹 눌러 담습니다’
참 섬뜩합니다. 여자가 질투를 하면 이렇게 무서워지는가요? 오늘 시를 제대로 읽은 사내들은 아마도 다시는 바람 피우지 않을 듯.
“그때, 오른손이 봉투 속에서 쑥 빠져나왔다 /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편 ‘시무외인(施無畏印)’”
이 시행 단순히 읽으면 마네킹에서 오른손 빠져나오며 보인 다섯 손가락. 그게 바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과 닮았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시무외인은 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려고 팔을 뻗어 다섯 손가락을 펴서 물건을 주는 시늉을 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겉만 보면 그렇게 읽어도 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의미를 담은 걸로 보입니다. 마네킹처럼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부서지고 맙니다. 그 부서지는 순간을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헌데 마네킹을 보십시오. 자신은 부서지면서도 다른 이에게 손 내미는 저 자비를.
이 시를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내가 마네킹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은 시앗을 시샘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무리 버티려 한들 절대자의 손에 삶이 해체되는 순간이 오니 그때가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길에 버려진 마네킹을 보고 한 편의 시를 자아내는 감성, 저런 감성이 참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