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리고 나의 확장
<James Bay - Let It Go>
먼 옛날,
(이라고 쓰고 약 한 달 하고도 보름 전 즈음)
누군가 내게 책을 한 권 건네왔는데 책의 이름은 작가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Agustina María Bazterrica, 아르헨티나)의 『육질은 부드러워(2017)』라는 책이었다.
그로테스크한 디스토피아 소설이지만,
내게는 오히려 우리 삶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역(逆)유토피아라고도 부르며,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나타내고 비판하는 사상.
토머스 모어 경(Sir Thomas More)의 『유토피아(1516)』 소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이상향'. 즉, "그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대륙"을 일컫는 말이며, 황홀경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수많은 유토피아를 그려댄다.
꿈, 사랑, 가족, 외모, 그리고 '이상형'이라는 이름의 리스트.
때문에 어렸을 때 이상형은
예쁘고,
똑똑하고,
유머 있고,
취미 맞고,
말투는 이랬으면 좋겠고,
MBTI는 저랬으면 좋겠고,
직업은 괜찮았으면 싶은 리스트는 끝없이 늘어난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이상형은 허들이 낮아지거나 사라지거나 변화한다...
라기보다는
무너졌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해 보이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형'은 조건이 아니라,
'나를 상처 내지 않을 사람'으로 다시 조건부를 형성하기도 하니.
내가 그 모든 것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나를 원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
"우리는 유토피아를 그리지만, 그 유토피아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디스토피아도 함께 상상한다."
그러니까,
나는 늘 불가능한 걸 꿈꾸며
그 불가능한 것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 여겼다.
상상 속 세계조차 나를 거부한다면,
현실의 나는 무엇을 살아야 할까.
이상형은 언제나 유토피아의 한 조각이다.
누구나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접어두었던 퍼즐 조각 하나.
나의 결핍을 감싸줄 이상적 타자.
내가 미처 꿰지 못한 실밥을, 조용히 감싸 쥐는 따뜻한 손길 같은 존재.
그: 삥이님
그: 애초에 이상형이라는 건
그: 유니콘 같은 겁니다
나: 흐잉...
그래서 이상형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즉 유니콘으로서 귀결되며, 우리는 그 명제(命題)가 창출한 진릿값(眞理値) 아래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가공의 이상향(理想鄕),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곳'을 의미한다.
이상형은 그 자체로 현실의 부재를 전제로 하는 듯싶은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없는 곳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일종의 '승부욕', '탐험가' 기질을 발동시키기에,
루피와 그 동료들이 원피스(ワンピース)라는 황홀경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여행 가방을 싸게 만들기도 한다.
그 여행 가방 안에는
인내력 한 스푼 (끈기),
사고력 두 스푼 (위기 대응),
상상력 세 스푼 (소망, 꿈),
그리고 나머지 네 스푼은 이상형을 위해 비워둔 채 가방끈을 닫는다.
그런데
이 '이상형'이라는 녀석은
너무 명확하고 정제될수록,
타인을 재단하는 틀이 되고,
사랑은 '선택지'로,
호감은 '조건'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다
이상형을 좇던 아이는 '선택할 수 없는 자유' 속에 갇히고,
누군가의 이상형이 되려 애쓴 아이는 '필터링된 존재감' 속에 길을 잃는다지.
결국 어느 순간,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지?"라는 의문을 담은 채
자기부정으로 점철된 디스토피아로 향하고 있던 길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
"이상형이라는 건 유니콘 같은 거야."라며
없는 곳을 향한 시원섭섭함을 내뱉기도 하더라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95년).
그가 말했더라지,
타자는 그의 얼굴로 나를 부르며, 나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L'Autre m'appelle, m'ordonne, me réclame.")
어쩌면,
이상형이란 본디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타자와의 긴장 속에서 드러나는 진짜 감정.
그리하여,
이상형이란 본디 '나열된 리스트'가 아니라,
우연처럼 다가와서, 당신을 흔들고 바꾸는 존재.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수많은 유토피아를 그려댔던 것은
권위적인 위계의 맛이 아니며,
허황스러운 상상의 맛 역시 아니고,
내가 어떤 사랑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더라지.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이상형은 줄어드는가?
그러므로 유니콘인가?
혹은 유토피아를 좇다 발견한 나의 확장인가.
유토피아를 꿈꾸던 우리들은 결국 사랑 속에서 디스토피아를 감지했고, 그 끝에서 평온이라는 현실을 배웠더라지.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이상형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즉,
이상형이란 건 줄어드는 게 아니라,
그 이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고르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의 겪음이었다.
'있는 곳'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하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그런 말을 남기셨더이까.
"인간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 (장폴 사르트르)
"삶은 앞으로 살아 이해해야 하고, 뒤로 돌아보아 설명해야 한다." (쇠렌 키르케고르)
유토피아를 좇던 나는 이제,
행위로 쌓인 오늘의 틀 속에서
스스로를 '있는 곳'으로 만드는 중이더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