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의 조합을 넘어, 서로의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Jóhann Jóhannsson – 'Flight From The City' from Orphée>
누군가 묻더군,
"똑똑한 남자와 따뜻한 여자가 만날 확률, 지능이 높은 남녀가 만날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필자가 답했지,
"몰라잉..."
[Chap 01. 흔하지만 복잡한 첫 조합]
: 하지만 그 지능은 다른 결의 방향으로 자란다.
[Chap 02. 드물지만 깊은 사랑에 대하여]
: 닮은 두 사람이 얼마나 자주 만나겠어.
[Chap 03. 누군가의 숫자 속 독백을 듣다]
: 왜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끝에 그를 안아주고 싶었을까?
[Chap 04. 철학을 믿는 사람의 외로움]
: 속된 말로 "Hey, stupid~!"
[Chap 05. 권위자들은 뭐라 하는가]
: "그 생각, 나도 해봤어."
[Chap 06. 이해하고자 멈추지 않는 사람들]
: 왜냐하면, 이미 당신은 사랑하고 있잖은가.
[Chap 07. 복잡한 사람의 작은 바람]
: 어쩌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Chap 08. 사랑은 예외로부터 시작된다]
: 다른 이에게 감정을 맡겨버리고 싶었던 순간들.
[Chap 09. 숫자보다 결을 말하고 싶었다]
: 음, 이게 드라마에서 말하는 '어른의 사랑'이려나?
[Chap 10. 결국, 나란히 걷게 되는 이야기]
: Positive vibe 전파, 올해 꼬였대도 no prob♪
"머리를 골똘히 쓰고, 계산하며, 세상을 한 걸음 앞에서 구경해 '어둠을 미리 본 사람.'"
"사랑받고 자라 베푸는 걸 좋아하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는 '빛을 느끼는 사람.'"
둘 다 '생각이 깊다'라는 전제가 있다.
하지만 그 지능은 다른 결의 방향으로 자란다.
한 사람은 구조적 세계를 해석하고,
다른 사람은 정서적 세계를 감각한다.
이런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실 인구통계학적인 자료는 접할 수 없고, 관련된 연구나 에세이에서의 주장을 토대로 간접된 근거만을 통해 유추해 낼 수 있다.
▶ 성향(tendency): 전자는 '회피형', '전략적', '감정 억제형'이라는 3가지 키워드를 두르고 있다. 반면 후자의 존재는 '안정형', '감정 개방', '관계 중심형'이라는 3가지 키워드를 두르고 있다.
▶ 지능(intelligence): 전자는 '추론', '전략 중심', '패턴 감지에 탁월'한 경향을 보이며, 반면 후자의 존재는 '정서', '공감 중심', '감정 해석에 탁월'한 경향을 보일 수 있겠다.
이제 이런 두 관계 속에서 대비형 인간은 리스크 계산 후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다. 즉, 계산이 끝나면 직진을 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 감정의 직감으로 관계를 형성할 확률이 있다.
실제로 이런 두 성향 간의 커플은 우리네 삶 속에서도 많은(흔한) 편인데,
심리학적으로 이 둘의 만남이 '잘' 성사되는 이유는 주로 대비형 인간의 경우 따뜻한 사람에게서 '감정의 안전지대'를 찾게 되어 끌리게 되고,
반대로 따뜻한 사람은 반대 존재의 '상처받은 날카로움'에서 보듬고 싶은 그림자를 보게 되기에 그럴 수 있다고 한다.
감정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과 감정으로 감정을 감지하는 사람은 서로를 읽는 방식이 다르기에 충돌도 많지만 그만큼 새로운 사고방식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사례라고 출처 없는 학자들이 설명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반전을 주자.
different situation,
포괄적인 '지능'을 곁들인 두 존재 간의 만남.
오히려 사랑 앞에서 지능은 가장 불편한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계산하는 사람은 사랑도 구조화하려 한다.
"이 사람이 날 좋아할 확률은 몇 % 일까?"
"이 관계가 나를 다치게 할 확률은?"
"지금 밀어야 할 타이밍일까? 기다려야 할까?"
그에 반해 따뜻한 감각의 사랑은 말없이 손을 내민다.
말보다 순간의 떨림이 더 정직하다는 것을 태생적으로 아는 그러한 사람들이 계시더라.
이들은 서로 오해한다.
한쪽은 "왜 그렇게 감정적이야?"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왜 그렇게 머리로만 사랑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오해가 겹겹이 쌓인 날들 끝에
둘만 아는 중간 지점이 생긴다.
이 중간 지점이 생기면 오래가고,
생기지 못하면 "안뇽, 잘 지내, 다신 보지 말자~"가 되는 거겠지.
결국에는 공감이고, 이해이고, 감싸안음이며, 사랑인데. 즉, 계산의 영역이 아닌 공감의 영역이다.
사랑은 말랑한 감정일지 모르지만, 그걸 품고 사는 사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너무 많이 아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만나도 쉽게 통하지 않는 때가 있다.
(굳이 '취향이나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전제를 빼서 '평균'으로 대입해 보자면 말이다.)
왜냐하면,
둘 다 먼저 "이건 진짜야?" 하며 생각하는 때가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이 수십 개씩 돌아가는 이들,
"이 대답은 이렇게 받아쳐야 하고, 저 말은 이 감정을 숨기고 있을 수 있으며, 이 장면은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식의 끝없는 대비적 추론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들이 서로를 만날 확률은 정말 드물지만, 만나면 깊을 수 있더라.
필자 역시 어린 날의 수많은 날들을 겪은 끝에 "포기하자,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라고 단정 짓던 때가 꽤나 최근까지였다.
복잡한 감정 속에 '앎을 저주하는' 이들은 "당신도 그 생각까지 해봤어?"라는 말에 놀라고, 안도하고, 처음으로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라는 복잡함의 위로를 받기도 하더라지.
심리학적으로 이런 사람들끼리의 사랑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 통하는 대화의 결이 형성되면 엄청난 유대감으로 이어진다.
ⓑ 하지만 '사람 수' 자체가 적다.
ⓒ 더 많은 사회적 필터(지적 자극, 정서적 해석, 대화의 밸런스 등)를 거쳐야 관계로 도달한다.
때문에, '생성 확률' 자체가 매우 낮다고 한다.
때문에, 대화는 되는데 사랑은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너무 잘 알아서 그렇다.
상대를, 세상을, 삶을, 본인을.
그래서 "당신을 받아들일게요"라는 선택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예외'가 생기고,
그 예외는 '사랑'의 경우이다.
그들의 사랑은 빠르게 타오르지 않을지 모른다.
외려 의심하고, 검토하고, 천천히 수렴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장 하나를 동시에 이해하고,
눈빛 하나로 '지금 너도 그 생각하고 있구나?'를 느낀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서로의 머릿속에서
'함께 있어도 편한 사람'이라는
상상도 못 했던 사적인 자리에 초대받는다.
아마, 이 순간은 필자의 좁은 식견에 의하면 '서로가 예상치 못한 설렘의 타이밍'이 될 것이다.
그 순간, 설렘은 마침내 이해가 된다.
얼마 전,
흥미로운 글을 하나 보았다. 원문은 200줄이 넘는 영문이었고, 그래프는 "뭐라는 거야" 싶은 감정을 유발하는 전형적인 가독성 꽝의 리포트였지만 그 글은 마치 '지능'이라는 단어를 해체하다 못해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 무릎 꿇는 한 인간의 독백 같았다.
그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자. 물론, 부분적으로 정합한 주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일반화 오류와 주관적 해석이 담긴 '개인의 리포트'였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가득했는데,
그 자는 일단 본인은 IQ가 159이며, 그의 여동생의 직업은 의사, IQ는 125와 135 사이의 어딘가였다고 한다. 그 자의 주장 중 첫 문은 "높은 IQ는 단순히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High IQ is not merely a quantitative thing; it is also a qualitative thing.)"라며 말이 시작된다.
그 글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네 가지 주장이 있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페미니스트였던 레타 홀링워스(Leta Stetter Hollingworth, 미합중국, 1886~1939년)의 심리 이론에 따르면 IQ 160 이상인 영재 아이들이 또래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주장이다.
즉, IQ 차가 크면 의사소통 방식, 유머, 관심사, 인생관에 차이가 생기고 이로 인해 장기적 연애나 우정 유지에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IQ가 높다고 반드시 소통이 안 되는 건 아니며, 정서 지능(EQ), 유연성, 공감 능력 등의 영향도 매우 크다는 주장은 결여되어 있었다.
재해석하자면 IQ는 사랑의 변수일뿐,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주장은 "IQ가 높을수록 사회화가 어렵고 외로워진다"였다.
이 주장에 대해서도 통계학적 근거가 일부 존재한다. 루이스 터먼(Lewis Madison Terman, 미합중국, 1877~1956년)과 스탠퍼드 대학이 주도한 천재유전학연구(Genetic Studies of Genius)에 따르면 IQ 135 이상 고지능자들은 정서적 안정성, 사회성에서도 평균 이상이라는 결과가 있다.
그러나 극상위권(IQ 150~60 이상)은 다른 결과를 보이는데 [나와 비슷한 지적, 감정적 자극을 주는 사람 부족 ▶ 사회적 소외감] 루트를 따른다는 경험 보고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자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결핍이 채워지는 것이 아닌 '대화의 결'이 맞는 사람을 찾기 어려움에 대한 외로움이었다.
세 번째 주장은 "고지능자는 양성적(Androgynous) 특성을 보인다"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논문적 근거는 일부 있으나 일반화는 위험해 보였다.
Feingold, A. (1994) 성격의 성별 차이: 메타분석에 따르면 고지능자들이 평균보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 덜 얽매인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 고지능자는 전통적 여성성보다 비판적 사고, 논리성, 독립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문화적 배경, 성격 유형, 환경에도 강한 영향을 받는 문제이기 때문에 원문의 저 세 번째 주장은 과도한 일반화라고 보이기도 한다.
네 번째 주장은 "IQ가 30 이상 차이 나면 관계 유지가 불가능하다."라는 주장이었다.
이건 과학적 사실은 아니다. 관련된 논문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수치는 통계적으로 보고된 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MBTI나 IQ 서브컬처에서 자체적으로 돌려지는 수치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화의 방식, 감정의 표현법, 사회적 경험 공유 여부가 우리네 삶에서는 더욱이 중요할 수 있겠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 자는 결국 "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단 한 명일지도 모르니, 무조건 잡아라. 또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무서울 만큼 솔직하고, 너무도 차가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나서야 필자가 느낀 감정은 아래와 같다.
"나는 외로웠어."
왜 숫자로 점철된 리포트를 읽었으면서,
왜 시를 읽은 것도 아니면서, 문학을 접한 것도 아니면서 내 마음속에는 눈물이 찼을까?
왜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끝에 그를 안아주고 싶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믿는 명제(Proposition)와 증명(Proof)이 있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다.
"신은 외로운 존재다.
처음에는 사랑받던 그 존재가 어느 날에서야 경외의 대상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고결한 대상으로 취급받아버리면, 나중에는 세계 문화유산 1호의 존재처럼 아무도 만져주지 않는, 탐(貪) 조차 허락되지 않는 외로운 존재.
그래서 슬피 울고, 함께하는 자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眞理)."
나는 포기했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
"응, 너는 말을 그렇게 밖에 못해?"
"너는 돈이면 다 되나 보네?"
"너는 왜 세상을 그렇게 보니?"
"너는 아군 아니면 적밖에 없니?"
등등의 판단들은 내가 수많은 사람들과 벽을 생성하는 근원이 되어왔었다.
아마, 너무 많이 겪은 탓이었을까.
혹은, 너무 많이 재단해 왔을까.
아니면 그저,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려움의 겁(怯)'은 어느 순간, 내가 짊어져야 할 '시간의 겁(劫)'이 되어 있었다. 마치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이, 오만하게 '기다림'을 품었다는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다.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Hey, Stupid~!"
한 때,
내게는 많은 것에 대해 자문을 구할 수 있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께 내가 많이 내뱉던 말 중 하나는 "그냥 저대로 살겠습니다 ㅋㅋ, 안되면 하는 수 없지요"라는 자조 섞인 포기의 말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즉 '외로움'을 느끼는 자의 언어이다.
결여된 사람부터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이름을 붙인다.
누군가는 그것을 '번따'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철학'이라고 읽을 뿐 전제가 같다.
아마,
나는 이것을 후자로 읽는 사람과,
같은 언어로 외로움을 번역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다르게 느껴질 때,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놓인 말들이 자꾸 엇갈릴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걸 유사성-매력 가설(Attraction‑Similarity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본인과 닮은 사람에게 끌리고,
그 유사성은 오해보단 공감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만든다.
세계 최대 규모의 주간지 <TIME>의 Eric Barker가 2016년에 기고한 《How to Make a Relationship Last: 5 Secrets Backed by Research》에 따르면, 감정지능(EI)이 높은 사람은 ① 상대 감정에 민감하고, ② 문제를 잘 조절하며, ③ 관계 만족도와 정서적 친밀감이 높다고 말한다.
또한,
2023년 발표된 어느 연구,
<Couple similarity in empathic accuracy and relationship well-being>에 따르면 공감 정확도와 감정의 이해는 닮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연구도 있다.
말하자면,
처음은 삐끗해도,
서사가 깊어질수록 눈빛 하나에 서로를 읽으며, 감싸 안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아마, 다툼보다는 이해와 보듬음이 더 많은 커플들이 주로 이런 유형일 것이다.
이를 <유사성의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아이디어'나 '사유'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친밀감은 감정적 유대를 훨씬 더 단단히 만든다.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경험, 그것은 관계에 있어 가장 고귀한 형태의 촉매가 된다.
키보드를 Google에서 뚱땅뚱땅 해보면 다음과 같은 문서를 엿볼 수 있다.
2024년, 대만 정신의학저널(Taiwanese Journal of Psychiatry)에 발표된 수스미타 할더 박사의 논문
<Rôle of Intellectual Intimacy in Psychological Well-being>에 따르면,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심리적 안정감의 핵심"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모든 연구가 말하는 건 하나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단지 외모, 조건,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생각, 나도 해봤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한순간 때문이라는 것.
왜,
우리가 친구를 만날 때 단지 같은 게임을 한다고 친해지는 게 아니라, 그 게임 속에서 "어 너도 그렇게 게임해?ㅋㅋㅋㅋ엌ㅋㅋㅋㅋ"하는 순간을 거칠 때 더 깊은 동질감과 안심을 받는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웃음 뒤에 숨어 있는 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안도감이다.
사랑은 대화를 통해 생겨난다.
하지만 '사랑한다'라는 말보다, '이해하려 한다'라는 태도가 더 깊은 감정을 전하는 때가 있다.
그들은 쉽게 호흡하지 않는다.
질문이 많고, 구조를 따지고, 때로는 상대의 감정을 논리로 해석하려 든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는 네 마음을 알고 싶어"라고 외치는 사랑법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속에서 긍부정을 따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당신은 사랑하고 있잖은가.
헤겔의 변증법 핵심인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 과정을 통해 모순을 극복하면 더 높은 단계가 있더라지. 사실, 그 높은 단계가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랑에는, 단순히 "네 편, 내 편" 말고, 초월적 긍정도 필요한 법 일지도. 직선이 아닌 원형 구조.
우리는 가끔,
"너도 나만큼 복잡했으면 좋겠어"라는 바람을 갖고는 한다.
그 말은,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면 좋겠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는 이래, 너도 나만큼은 와줬으면 좋겠어'라는 Give and Take 심리이기도 하다.
단순한 사람은 아름답고 쿨하다.
복잡한 사람은 이해받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후자에게 외로움은 마치 운명인 것처럼 따라온다.
가면을 쓰고 많은 이들을 향해 갈 것이냐,
가면을 벗고도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냐.
죽음의 이지선다 속에 갇히기 마련.
"나를 쉽게 이해하지 않아도 돼. 다만 나를 해석하려 들 때, 네가 나만큼 복잡하길 바라."
서로의 방정식을 풀어내기 위해,
너무 많은 전제를 깔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 복잡함 마저도 묵인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만날 확률은 낮다.
하지만, 만났다면 서로를 오래 바라볼 수 있다.
논리로 무장한 이들은 상대의 감정을 분석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감정에는 수학이 틀린 줄도 모른 채 휘청이는 때가 있다.
그러니,
통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사랑이다.
자신을 해체하고 싶은 욕망을 품은 채,
다른 이에게 감정을 맡겨버리고 싶었던 순간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조합을 떠올린다.
"세상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이성과 세상을 사랑하는 감성."
그래서 형, 누나들은 그런 말을 한다.
"계산이 많은 사람은 따뜻함으로 보살핌 받아야 해."
그 조합은 아름답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안정감도 있고, 때론 그런 상보성에서 사랑이 움트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는 때도 있다.
정반대의 조합보다, 비슷한 구조 속에서 서로의 복잡성을 껴안는 사랑이 더 '깊다.'라고 말할 수 있는 때.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한 보완이 아니라, '해석'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같이 생각하고,
같이 감정의 구조를 나누며,
서로의 복잡함을 향해 감탄을 보낸다.
그런 사랑이란,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하고자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음, 이게 드라마에서 말하는 '어른의 사랑'이려나?
아직 30살도 못 먹은 내가 오또캐 아로잉.
그는 늘 지도를 펼쳐놓고,
최적의 경로를 계산하고는 했다.
어떤 길은 막혀 있고, 어떤 길은 비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람을 따라 걷고 있었다.
가끔은 눈을 감은 채로 걸어보기도 한다.
그들은 어느 날, 같은 길목에서 마주쳤다.
누가 먼저 멈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길을 내주지 않았고, 누구도 먼저 가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나란히 서 있었다.
"왜 그 길로 온 거야?"
"왜 넌 그 길밖에 몰라?"
긴 침묵 끝에,
둘은 같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멀리서 걷던 두 갈래 길이,
마침내 하나의 선이 되었을 뿐이다.
사랑은 가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품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멀찍이서 걷던 두 사람이 서로의 '복잡함'이란 지도 끝에서 나란히 손을 잡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늘 그랬듯이,
누군가 물었지만,
쓰는 건 내 바램이다.
나는 두 손을 맞잡는 사랑을 더 믿는다.
지금까지 쓴 내 모든 글은 다른 길에서 왔다가 '손 뻗는 사랑'보다는 비슷한 길에서 걷다가 '마주 잡은 사랑'을 이야기해 왔다. 《나는 내 인생의 배우다》부터 《나는 당신의 법문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까지 단 한 번도 그 감정을 벗어나 보지 못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사유는 끝나지 않기에, 그들은 계속해서 사랑을 생성해 간다.
정답이 아니라,
말의 결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
그게 내가 바라는 진짜 공부.
"너 틀렸어 바보야."
"아니거든, 방금 네 말에서 이 부분이 논리 빈약이거든!"
그것은 아마두,
누가 더 멀리까지 서로를 해석해 보려 애썼는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 속 구절이 다음을 말한다.
빨간불은 파란불로 바뀌어, 웃어, 하하호호
걱정해봤자 뭐 답 없어, 잃지 말자, 낭만을
Positive vibe 전파, 올해 꼬였대도 no prob
성장한 거야, 뒤돌아보면 안줏거리고 영웅담
태어난 건 내 선택 아니었지만 삶은 내꺼지
뭐 어쩔 건데, 누가 뭐래도 첫 번째, 내 행복이
이걸 나눌 수 있단 사실이 내면을 부자로 만들지
날씬 추워도 마음은 따뜻해, 멋진 친구가 많으니 ya
└ 아마두 (feat.우원재, 김효은, 넉살, Huckleberry P)
누군가 묻더군,
"똑똑한 남자와 따뜻한 여자가 만날 확률, 지능이 높은 남녀가 만날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내가 답했지,
"많은 건 이성과 감성의 조합일 지도 모르죠,
허나 깊은 건, 서로의 복잡함에 감탄하는 만남일지도 모르죠.
제가 믿는 건, 그 깊은 사랑이니."
복잡한 길 위에서, 결국 나란히 걷게 되는 사람들.
이것은 사랑이 사유가 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에서 오다가 부딪힌 사랑과
비슷한 길을 걷다 어느 교차점에서 만나 같이 걷는 사랑 속에서 늘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