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끝에, 희열이 있을까

삶을 견디기 위해 당신과 나는 오늘도 질문을 앓는다.

by 삥이


생각, 사고력이 깊은 사람에게 지적 호기심과 희열은 필연일까?



사고력이 깊다는 것은

그저 생각이 많다는 말과는 다르다.


언제나 원인을 묻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질문을 끊지 못하고 되레 중독된 상태.





<Sufjan Stevens - Mystery of Love>






그런 사람들에게 '지적 호기심'이라는 키워드를 빼보자.


아마,

3가지 상태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① 감정이 메마른다

② 일상이 지루해진다

③ 세상과 거리가 벌어짐을 느낀다


즉,

외로움에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지적인 자극은 곧

생존의 숨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에 가까운 상황이지 않을까.







but,

상황에 반전을 줄 장치를 하나 심어보자.



"희열"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가?


아니지 않을까.


사고력은 깊은데 이것이 '희열'로 이어지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① 생각은 깊지만, 결과에 늘 지치는 자

② 탐구는 하는데, 끝에는 좌절하는 자

③ 말은 많은데, 내면은 공허한 자







and,

상황에 타당성을 줄 논제(論題)도 심어보자.



앉은뱅이 v 진짜 공부하는 자.


여기서

앉은뱅이란 누구인가,

"지식의 껍데기를 쥔 자"를 의미한다.


그들은 지식을 소비하지만,

결코 지식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목적은 자격증이요,

목표는 사회적 인정이며,

학습은 수단,

수단은 권위,

권위는 생존으로 이어지는 분들.


그들은 "사고한다"라기보다는

"암기한다", "합격한다", "승진한다"라는 열망이 더욱 강하기에 지적 희열과는 다른 감정을 갖는다.


그럼,

진짜 공부하는 자는 누구인가,

"홀로 기뻐하는 자"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공부가 곧 경험이고,

경험이 곧 사고인 사람들.


그들은 자격증이나 면허증 없이도

삶을 공부하고, 슬픔을 논문처럼 읽고, 사랑을 철학처럼 해석한다.


단어 하나에 울컥하고,

질문 하나로 밤을 새우며,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기쁨,

그게 사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


그들에게 지적 희열은

생존 방식이며, 자기 구원 방식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어떤 학계에서 생기는 여러 학파 중

과거부터 2025년 오늘날까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대표적인 두 학파를 거론하라면


'같은 박사, 다른 인간 군상'의 두 학파,

즉 "합격주의자 v 고백주의자" or "문서주의자 v 서사주의자"로 나눠볼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

실용과 권위 중심의 앉은뱅이 학파에는

소피스트파, 스콜라주의(Scholasticism), 데카르트나 스피노자가 대표적인 합리주의(Rationalism), 그리고 현대의 실증주의(Positivism)가 그렇다.


반대로 감정과 가치 중심의 학파에는

소크라테스파, 신비주의자(mysticism),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경험주의(Empiricism), 그리고 현대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가 그렇다.






이 모든 걸 감정으로 묶어보자.


결국,

사고력이 깊은 이들에게 "지적 희열"은 지식의 쾌감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정의 증거인 것이다.


때문에 보통 그런 분들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문서를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속도는 느릴지언정 어떠한 것 하나의 개념을 깨우치는 그 순간을 매우 귀중하게 여긴다.


이것은 마치 하룻밤의 뜨거운 입맞춤보다,

느리게 베인 향기로 하루를 버티는 사랑에 가까운 것이다.


그들에게 책 한 권은 연애고,

논문 한 줄은 사랑의 증명이며,

질문 하나는 "살아 있는가?"라는 자기 확인일 수도 있다.


텅텅 빈 것을 미워하진 않지만,

"왜?"가 따라붙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때때로 말이 많고,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침묵 속에서 멀리 사라진다.


말이 많다는 건, 묻는 게 많다는 뜻이고,

묻는 게 많다는 건, 삶을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적 희열은 정말 필연(必然)일까?


나는 말하고 싶다.

그건 필연이라기보다 숙명(宿命)이라고 말이다.




사고력이 깊은 자에게 그 희열이 없다면,

세상은 너무 불투명하고, 말이 너무 무기력해진다. 너무 슬퍼진다. 마음이 아파진다고. 내가 사라지는 것만 같잖아.


즉,

그들은 결국,

"알아야 견딘다"라는 감정을 품은 채

하루를 살아낸다.


그래서 생각은 도피가 아닌 생존이고,

지적 희열은 유희가 아니라 자기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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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 of BrunchStory iN 삥이]


이제 감정은 자리 잡았고, 이제는 논증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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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질문을 멈추지 못할까?



왜 당신은,

왜 나는 그러느냐 이 말이다.


질문을 던진다는 건 사는 일이고,

대답을 구한다는 건 존재를 구하는 일일까?


그래서 사고력이 깊은 사람은

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햇살 아래 빛을 뿜어댄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그 끝에 "희열"을 만난다.



심리학자 Emily M. Grossnickle가 2014년에 발표한 「Disentangling Curiosity: Dimensionality, Definitions, and Distinctions from Interest in Educational Contexts」에 따르면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일종의 내면적 긴장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이 긴장은 가벼운 흥미가 아니라 '나 자신을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숨구멍'으로 작동하는 내적 욕구가 된다.


호기심이 희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한 정보 부족(information gap)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부족함을 견디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탐구'로 전환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결국,

지적 희열은 질문이 아닌, 질문의 끝을 마주한 용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VIA 성격 강점 이론에 대해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다.


위 이론은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과 크리스토퍼 피터슨(Christopher Peterson)이 만든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대표적인 도구다.


그들이 정리한 성격 강점은 총 24가지.


각 강점은 정의, 사례, 표현 방식, 교육적 활용도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 이번에 살펴본 「Combined_24 Character Cards」 문서에서는,


내가 던졌던 질문,

"왜 우리는 질문을 멈추지 못할까?" 에 답을 줄 수 있는 세 가지 성격 강점이 눈에 띄었다.



1) Love of Learning (학습에 대한 사랑)

: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지식을 깊이 탐구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성향이다. 공부 자체가 목적이고, 배움 그 자체가 하나의 희열이라고 한다.


2) Curiosity (호기심)

: 경험, 지식, 감정 등 '미지의 것'을 향한 강한 끌림이 있다. 익숙한 질문에도 계속 다른 대답을 상상하려는 습관, 그게 바로 깊은 사고력의 시작점이 된다고 한다.


3) Perspective (통찰력)

: 상황과 감정을 넓고 깊게 바라보고, 그것을 '말'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여러 층위를 통합하고, 하나의 문장으로 전달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방대한 이론과 썰을 종합 하여 '맛깔나게' 설명하는 박사들이나 교육자들이 이에 해당할 듯싶다.



결국,

우리는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 있으려고 질문하는 것,

흔들리는 나를 붙잡기 위해 다시 묻는 것.


내가 브런치스토리에 작가 신청한 이유도 역시 흔들리는 내가, 내 눈에 자꾸 보이니 한 번 신청해 본 거였다.


그리하여,

호기심은 지식의 출발점이 아니라, 삶의 증명이지 않을지.



내 하루 속에는 누군가의 질문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알면서도 또 그 질문을 내게 다시 묻는다.


왜냐하면,

그 질문 끝에는 '희열'이 아니라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었다,

삥이 속 삥이의 얼굴.


그 표정, 그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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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 of BrunchStory iN 삥이]


자,

이제 질문은 충분히 했다.


그러니,

이제 답을 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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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모든 걸 통해 어떤 삶을 살아간다는 걸까?



우리라는 존재,

당신이라는 그 독특한 사유의 인간들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나의 문장'으로 번역해 내면서 살아간다는 말인가.


남들이랑 다른 것 맞나?

오만인가? 자만인가?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묻게 된다.

'호기심이 있다'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필자가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Now is good>에서

죽어 가던 병을 앓던 여자 주인공 테사(다코타 패닝)는 죽기 전 자신이 마주한 연인, 남자 주인공 아담(제레미 어바인)에게 말한다.


다코타 패닝은 극 중 삶의 끝을 앞둔 인물로서, '모든 질문을 앓는 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담은, 그 질문 끝에서 마주한 그녀의 희열이었다.


영화 Now is Good 중에서.


테사: 물수제비 잘하네, 새 위시리스트에 적어둬야지.

아담: 리스트에 또 뭐 있는데?

테사: 너무 많아. 봄, 수선화랑 튤립, 긴 기차여행, 공작새, 침대에서 아침 먹기, 공동계좌 만들기, 너 코 고는 소리 평생 듣기, 학부모 참관 수업 갔는데 우리 아이가 천재인 거, 너랑 있기, 너랑 있기, 너랑 있기, 그냥 너랑 있기.


아담: 진짜로 원하는 거 뭐야?

테사: 어둠 속에서도 너랑 있는 거, 날 안아주고, 날 사랑해 주고, 내가 무서울 때 달래주고, 끝이 왔을 때 내 곁에 있어줘.

아담: 내가 잘못하면 어쩌지?

테사: 잘못하는 건 불가능해...



이쯤에서 감히 말할 수 있다.

호기심이란 '살아 있으려는 자의 마지막 시도',


생각이 깊은 자는 질문을 멈추지 못한다.

질문을 멈추지 못하는 자가 원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니까.



나는 그런 사람을 보고 싶다.

지식을 좇기보다, 질문을 앓는 사람.

논문을 쓰기보다, 고백을 쓴 사람.


그런 분들은 아마 그런 말씀을 해주실 지도 몰라.


"어때? 우리가 만든 거 예쁘지?"



내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어떤 질문을 앓고 계신가요?"


내가 자신에게 묻는다.

"그 질문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 것 같아?"



그 끝에,

희열이 있을까?


그 희열이,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존재였기를.





[참고 문헌]

- VIA Institute on Character.

24 VIA Character Strengths Cards.

출처: www.viacharacter.org


- Grossnickle, E. M. (2014).

Disentangling Curiosity: Dimensionality, Definitions, and Distinctions from Interest in Educational Contexts.

Educational Psychology Review, 28(1), 23–60.

DOI: 10.1007/s10648-014-9294-y


※ 위 자료들은 미국의 멋쟁이 아저씨, 누나들이 만든 자료입니다. 이 글에선 비영리적 글쓰기와 지식 나눔의 취지로 공유함니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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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어도 질문이 있다.


이들의 눈빛에는 희열과 공허,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나 있기에.



그리고,

수많은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고 싶어 발버둥 치는,


이렇게 살아가는,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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