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도수로, 도수는 감정으로
"술은 맛보다 기억으로 남는다."
<Ludovico Einaudi - Experience>
술을 마시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무엇일까?
볼의 불그스름 정도?
앞에 앉은 그 이의 감정 온도?
예상치 못한 술값에 움찔하는 주머니도...
아니다.
'기억'이다.
O2린의 화장품 맛도,
처음처럼의 말랑함도,
결국 그 맛이 아니라 그 이의 표정이 먼저 떠오른다.
Chap 01.
딱히 마시고 싶었다기보다 '어른처럼 보여야 했다'라는 강박 혹은 호기심이 컸던 시절.
어쩌면 "화장품 맛"이라고 기억하는 내 감정도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아빠는 지금도 02린 아니면 다른 술은 마시지 않거든.
다른 맛을 느끼시나 봐.
어쩌면 다른 감정, 엄마와의 기억일지?
"국민 소주"라는 말처럼 20대 대다수의 삶 속에 스며들었던 액체.
내 앞에 놓인 사람 1, 사람 2, 사람 3, 사람... 100.
익숙해서 지루했고, 당연해서 놓친 감정들.
사실 진짜 독한 건
당연한 게 제일 무서운 '무던함'의 감정이었다.
"엄마 사랑해"라는 말보다 "엄마 나 집 들어가"라는 말이 먼저 나오던 그때.
"이거 진짜 맛있어"
라고 말하며 건네던 내 잔 권유를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오, 나두 이거 좋아'
처음 나를 취하게 한 건 술이 아니라,
걱정 섞인 말투와 살짝 웃던 그 눈빛이었을지도.
부드럽고, 달콤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시지 않는다.
친구들이 다른 거 마시거든.
진로, 새로, 좋은데이, 대선, 한라산.
다 같은 희석식 소주인데 왜 맛은 다 다를까?
아 뭐 제조 과정이 다르겠지, 농도도 다르고.
다만, 일개 개인의 감정에 상품이 끼치는 영향은 '제조 과정'보단 당시의 '기억'이다. 보통 소비자는 기억의 발화(發火)로 지갑을 만지작거리지.
다 같은 희석식 소주임에도 그 안에서 맛을 구별하고 호불호를 구분할 수 있던 것은 내가 "소믈리에"라서가 아니라 "그날 품었던 감정"의 농도 차이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누군가는 웃으며,
또 누군가는 홍조를 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독기를 안으며,
또 어떤 날의 누군가는 울며 마셨으니까.
그렇게 다양한 감정을 마시며,
나는 결국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늘 혼자였지만,
그 감정들만큼은,
혼자 마시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해 줬다.
Chap 02.
항상 혼자였다.
물리적으로 혼자라기보다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게 늘 혼자로 놓이게 했던 듯해.
축구하고 난 뒤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학생 카드 찍고 읽었던 《먼나라 이웃나라》 전 편. 혹은 기타 역사 이야기들. 초등학생 때는 시(市) 대표로 다독왕도 여러 번 탔다지.
더 커서는 글을 썼다.
PC방에 가서는 블로그 썼고,
노래방에 가서는 스토리를 그렸고,
심지어 군대에서는 노트에 작계(作戰計劃/Operation Plan)를 아카이빙 하는 게 취미였다.
항상 혼자였다.
하지만 그 혼자라는 포지션은 언제나
늘 누군가들의 다정함에 둘러싸이는 존재로 나를 이끌기도 하더군.
나는 늘 초대된 사람이었고,
어떤 테이블에선,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는 법이다.
단순히 '관심'이나 '선의'같은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 묘한 것들.
잔을 들지 않아도 얼굴이 뜨거운 날들이 있었고,
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시선이 먼저 흘렀던 날들도 있었고.
그랬지, 아마.
솔직히,
그 감정의 무게는 술의 도수와는 전혀 달랐다.
Chap 03.
술은 액체다.
조금만 넘치면 화장실을 부르니,
기억은 추상체다.
시세포는 그날의 색깔을 기억하니,
감정은,
그리하여 도수다.
그 이의 목소리 진동수,
그날의 공기 밀도,
그리고 눈빛의 농도와 함께
천천히 나를 해체시키는 감정의 용매.
아마,
나는 늘 '몇 도 짜리 감정'을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In vino veritas, in aqua sanitas."
고대 로마 속담이다.
"와인에는 진실이 있고, 물에는 건강이 있다"라는 의미이다.
감정이 흐르는 변화를, 이성은 경계하지만,
진실은, 경계 없이 흐르는 순간에만 튀어나온다.
그것이 때로는 비겁해도, 아름답다.
술은 혀보다 빠르게 기억을 말하고, 눈보다 먼저 심장을 울리게 하기도 하니까.
기억은 도수로,
도수는 감정으로.
그리하여,
늘 다른 감정의 도수(度數)
"도수"는 감정의 농도다.
그리고,
그 농도는 타인에 의해, 관계에 의해, 그리고 기억에 의해 증류되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넘치듯 마시면 다음 날 아침에
"내가 또 마시면 개다"라고 외면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라고 다시 되찾더라지.
구정(舊情)이 아직 식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신정(新情)이 조용히 피어날 조짐일까.
술은 때로,
사랑에 대한 기억,
혹은 사랑에 대한 기대인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