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신뢰가 머무는 자리에서
밤이 깊어지면, 말은 줄고 마음은 커진다.
소음이 사라질수록, 그들은 서로를 더 잘 듣는다.
많은 이들은 이를 소위 '새벽 감성'이라고 부른다.
SNS 감성 글귀, 감성 사진,
인스턴트 문학의 파편처럼 흘러가곤 하지만,
오히려,
그 새벽이 품은 정적의 심연 속에서,
오히려 관계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이다.
침묵이 사랑을 증명하고,
말없음이 신뢰를 품는 순간들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신뢰'가 기저에 깔리지 않으면 '예의'를 점철해야 하기에 말이 길어진다. 옅은 미소를 띤 채 가면을 쓰고 응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뢰가 '기저'에 깔리기 시작하면 말의 길이는 고무고무가 된다. 어느 때는 탄력성이 0보다 크고, 어느 때는 0보다 작아질 수 있지. 존재를 감각하는 태도인 것이다.
고래는 울지 아니하나이다.
소리는 깊은 물결에 잠기었고,
허나 파장만은 남아 출렁이더이다.
바람은 말이 없었사오나,
지나간 자취, 나뭇잎 떨림에 스며 있었나이다.
사랑은 어느 때에이까?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마음을 울리며,
말을 삼키고도, 숨결로 흔들리었나이까?
말 아니하였으되,
내 마음 먼저 다녀간 줄,
혹 아셨나이까.
관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덜 묻는 경향이 있다.
"왜?"
"무슨 뜻이야?"
"진심이야?"
이런 질문들은 관계가 미성숙할 때 자주 등장한다.
그 질문들은, 아마도 그 자체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일 지도 모르겠다.
자,
여기서 '신뢰'를 덕지덕지 발라보자.
그럼 관계는,
이제 점점 설명을 벗어난다.
인간은,
어쩌면 우리는,
그리하여
당신네들과 나라는 작자는,
다 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 몰라도 괜찮다고 느끼기 때문에 말을 덜 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인들은 아래와 같은 과정을 겪는다.
누군가 말이 급격히 줄어들면,
"기분 나빴어?"
"내가 뭘 잘못했어?"
하지만 그 침묵이
불편해지지 않을 때에는,
그냥 곁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는 순간이라는 게 있더라고.
신뢰란,
"그래도 괜찮아"를 품을 수 있는 우리의 용기이다.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될 테지.
사랑이란 "이유를 설명해 줘"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 있는 넉넉함의 미학인 것이다.
때문에,
신뢰는 결국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의 영역으로 남게 되기도 한다.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고,
묻지 않아도 곁을 내어주는 것.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더 깊이 품게 된다.
삶을 살며
그런 이들은 1명 이상인데
결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되진 못한다.
정말 정말 친한 친구,
정말 정말 눈물 나는 부모님,
정말 정말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면 곁에 앉아주는 것보다 '너 괜찮아?'라며 카카오톡 선물을 건네기에 바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그가 말했다.
"말은 존재를 드러내지만, 침묵은 존재를 품는다."
그리고,
"존재의 고요한 울림은, 소음이 아닌 정적에서만 들려온다."
(원문: Nur im echten Reden ist eigentliches Schweigen möglich. Um schweigen zu können, muß das Dasein etwas zu sagen haben.)
그의 말을 해부해 보자.
침묵은 단순한 무언(無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가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어떤 사람이지?
서양 철학 전체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다.
"언제부터 철학자들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잊었냐 참 ㅋㅋㅋㅋ"
라는 말을 당당히 내뱉은 인간이다.
그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존재를 드러낸다고 말하지만, 가장 깊은 존재의 고백은 말이 아니라 '그저 있음(Dasein/현존재/인간)'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말씀하시더군.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존재를 드러내는가?
말을 많이 할수록,
사랑이 커지는 것인가?
아닐걸.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은 아니지 않은가. 안 예쁜 말도 있고 뭐..
사랑이 커질 때,
사람은 말이 없어지기도 한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이 필요 없을 만큼' 가득 차 있는 관계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침묵이 질문보다 더 큰 신뢰요,
대답보다 더 큰 고백이 될 때가 있다.
존재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울린다.
그 울림은 큰 소리가 아니라, 큰 파장으로 남는 것이다.
마치 깊은 바다의 고래가
소리를 삼키고 파장을 남기듯이.
그저 곁에 머무르는 것,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의 무게로
그 어떤 사랑의 말보다,
혹은 권력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무게는,
침묵 속에 가장 오래 남는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누군가는 말보다 '눈'을 보고,
누군가는 눈보다 '침묵'을 듣게 된다.
"사랑해"라는 말은
사랑을 증명하지 못한다.
"왜 사랑해?"라는 질문도
사랑의 본질을 파고들지 못한다.
사랑은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느껴지고, 그저 건너올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언어로 쳐야 되는가?
어쩌면,
파동이고, 공명이며, 흔들림일 것이다.
그것은 필히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무한한 신뢰 혹은 무한한 헌신의 감정을 느끼는 때가 있다.
그것은 상대의 말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였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이해는 해석의 영역이고,
받아들이는 것은 존재의 수용이니.
제2차 세계 대전,
그 거대한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건 암호였다.
소리 없이 전장을 지배한 수수께끼.
누구는 독일의 에니그마를 깨 드렸고,
누구는 침묵 속에서 암호를 통해 전황을 뒤바꿨다.
냉전시기.
말보다 '은닉된 정보'가,
협상보다 '감지된 정적'이 스파이를 통해 세계의 운명을 가르기도 했었지.
사랑도 이처럼,
문장이 아니라 감정의 암호다.
우리는 그것을 번역할 수 없다.
다만 해독될 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도 좋지만,
"나는 네 침묵이 익숙해"라는 말도 사랑일 테지.
이렇듯,
삶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더라지.
말과 말 사이,
눈빛과 눈빛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어떤 이들은 서로를 품는다.
침묵과 신뢰는 사랑의 격정이나 감탄보다 더 깊은 차원의 '지속'을 말하기도 한다.
나는 늘 설명했고, 당신들은 묵묵히 들었다.
당신은 이해했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우리는 말보다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나누게 되었다.
결국 침묵은 '부재'가 아니다.
그건 '가득 참'이다.
그리고 신뢰는,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그렇다면
나는 기쁨인가, 나는 슬픔인가.
필자는 여기서 묻지 않는다. 당신의 대답을 유도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나 자신을 감정이라는 언어의 경계 위에 올려본다.
감정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반사되는 유동적 현상일 수도 있다.
"타자 앞에서의 무한한 책임."
그리고 "너로 인해 내가 나임을 깨닫는 존재론적 진실".
이랬던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나는 한때,
말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적 허영,
존재의 증명.
그 말들은
정답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침묵이 겁나던 시절도 있었다.
밤을 새워 건네었던 제안서에 응답하지 않는 클라이언트의 대답을 기다리던 수많은 밤들의 연속.
한때는 침묵이 곧 외면인 줄 알았지.
그러나 많은 날을 거쳐 내가 깨달은 것은
'침묵'은 무조건적이 외면이 아닌 그저 오해였다는 것을,
아무 말 없는 밤이
어느 때는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삼키기로 했다.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질문 대신 믿음을 건네기로 했다.
삶은 해석되지 않는 감정들도 이루어져 있다.
사랑, 신뢰, 그리고 존재 또한 그렇다.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설명하려는 것보단,
대신 그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강력한 '말'일지도 모른다.
아,
내가 그래서 브런치에서 울부짖었구나.
머묾을 쓰려고.
그렇다면,
이 글을 머무는 자는 누구인가.
'나'인가,
혹은 독자인가,
아니면 당신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신인가.
그도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