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리스트가 아니라, 망설임이니까
사랑은 '왼쪽'으로 스와이핑할 수 있을까?
이상형은 스와이핑할 수 있다.
리스트의 나열이니까.
그런데, 당신의 마음마저 그럴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건 리스트가 아니라, 망설임이니까.
<Sufjan Stevens - Visions of Gideon (From "Call Me By Your Name" Soundtrack)>
띠링, 매칭되었습니다. 이 사람과 대화해 보시겠어요?
스마트폰 속 알람은 신(神) 아니다.
그저 기획자와 개발자가 설계한 알고리즘일 뿐이다.
감정은 가격표가 되었고,
관계는 사용자 경험(UX)으로 설계되었다.
우리는 문득 묻게 된다.
사랑은 자유였을까, 조건이었을까?
2020년대, 알고리즘이 연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정보는 넘쳐나고, 검색은 습관이 되었으며, AI는 '대충'을 정답처럼 보이게 한다.
이제 진짜 능력은,
'판단하고, 걸러내고, 수용할 줄 아는 사고력'으로 이동했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외로움은 곧 '상품'이 된다.
사랑이 외롭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기회니까.
우리가 외롭다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곧바로 되묻는다.
"그래서, 뭘 원하시나요? 위로인가요, 연결인가요, 아니면 단순한 설렘인가요?"
감정은 그렇게 옵션이 되고, 위로조차 결제창을 만난다.
요즘 연애는 클릭 한 번이면 시작되고,
알고리즘은 적절한 상대를 추천해 줄 수 있다.
때문에 알고리즘은 나보다 나를 잘 알고,
소개팅은 큐레이터가 대신 정해줄 수 있다.
'어떤 취향',
'어떤 감성',
'이런저런 키워드'..
그 속에서 사랑은 선택지가 되고, 선택은 곧 상품이 된다. 결제.
제대로 된 광고인들은 안다.
소비자들이 '댓글'을 남겨야만 반응이 아니고, 고객이 '답장'을 줘야만 반응이 아니라는 것.
진정한 광고인들은 안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도 말하고 있다는 걸.
그들은 그 '비언어'를 캐치해 낸다. 무섭도록 정교하게.
'MBTI', '이상형 테스트', '여자 번호 따는 법', '내 조건에 맞는 배우자는?',
사랑은 이제 콘텐츠고,
연애는 이제, 잘 설계된 사용자 경험(UX)이다.
좋아요, 댓글, 피드백, 삭제.
브랜드는 더 이상 감정을 팔지 않는다.
그들은 조건을 판다.
'연애'라는 말 대신 '매칭',
'감정'이라는 말 대신 '궁합'.
그러면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사랑을 한다는 건, 서로의 결핍을 받아들이는 일일까? 아니면, 서로의 조건을 맞추는 일일까?"
그 질문이 없다면,
사랑은 '스펙'과 '숫자'에 눌릴 테지.
외모, 배경, 연봉, 유머, 센스 그리고 헌신의 정도까지..
그러나 숫자로 설득하려는 사랑은
때때로 감정이 아니라, 폭력이다.
감정의 소유욕이며,
동시에 당신이라는 존재를 '위안 도구'로 환원시키는 오만한 방식.
앱과 매칭 시스템은
'사랑의 정서'가 아닌, '조건 충족의 확률'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
누군가는 말하겠지.
"어때? 현실이잖아."
하지만 그 '현실' 속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상처받는다.
젠장,
숫자 좀 그만 봐.
감정은 정답지가 없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그건 오디션이지 않을지.
생각해 보면,
내 친구들도 앱에서 스와이핑하고, 애프터 하더군.
글램, 위피, 그리고 그 비슷한 이름들.
인증된 외모 + 인증된 직업 = 인증된 진심?
공식이, 어딘가 이상하다.
진심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다.
진심은 인증될 수 없다.
그저, 드러나는 것일 뿐.
나는 그저 나 자신인데,
왜 이렇게 설명해야 하는가.
왜 '내가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냐구.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소개팅 등을 싫어했다. 헌팅 같은 것도 마찬가지.
마치 동물원 속 원숭이가 되는 기분.
누군가의 웃음을 얻기 위해
내 농작의 수확물을 들이밀어야만 하는 구조.
왜,
사랑이 경쟁의 결과여야 하는가.
독일 연방의 마르틴 하이데거,
서구 철학 전체에 한 방을 날렸던 그가 말했지.
"기술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를 은폐한다."
게슈텔(Ge-Stell)의 폭력인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강'을 볼 때,
어떤 이는 더 이상 "아, 자연이 아름답다."라고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그곳을 수력 발전소 건설지로 보기도 한다.
그 사람에게,
숲은 목재 창고요,
인간은 인적 자원일 수도 있겠지.
기술은 사물을 '그 자체'로 보게 하지 않고,
'어떻게 쓸 수 있을까'라는 관점으로 사로잡는다.
우리는 점점 더 사람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 감각'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랑도 마찬가지.
기업은
고객을 숫자로,
감정은 확률로,
관계는 데이터로,
존재는 조건으로 치환한다.
하이데거 철학에 의거,
존재는 그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 자체로 있는 것"을 바라보는 연습,
그리고 기술을 넘어서 존재를 회복하는 감각.
당신네들이 코웃음 치며 안 하겠노라면,
외려 나는 죽어도 열심히 지속하겠노라.
나는 누구를 위한 사람인가?
아니지,
난 나야.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사랑이 조건이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무섭다고 느꼈다.
상대의 마음까지 숫자로 변해버릴까 봐.
내가 그 숫자 속에 납작하게 눌려버릴까 봐.
우리는 보통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정작 상대는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한 검증을 거치기를 원한다.
그것이 '기간'이면 좋겠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숫자'와 '인증'이 되는 '서류'로서 검증이 되기도 한다. 즉, 필터.
이 사이에서
우리도 '역 필터'를 설치하기 마련이다.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감정.
지지 않아도 괜찮은 기다림.
머묾은 미학이요,
침묵은 신뢰이며,
반가움은 그 어느 때보다
말없이 다정한 애연(藹然)한 미소.
누군가는 말이 많고,
누군가는 말이 없고,
누군가는 말이 많고 동시에 없다.
어떤 사랑은 깊고,
어떤 사랑은 뜨겁고,
어떤 사랑은 깊고 동시에 뜨겁다.
어떤 사람의 말은 가시가 있고,
어떤 사람의 말은 각시처럼 곱고,
어떤 사람의 말은 가시가 있되 각시 같다.
자, 9개를 평가해 봤다.
결국, 별게 아니었다.
Just a List, and human.
말의 수는 다르고,
사랑의 온도는 다르고,
말투의 결은 다르지만
결국, 다 사람이다.
결국, 다 사랑이었다.
이렇듯,
감정은 설명하려 할수록 멀어지더라.
그래서,
나는 감정을 살기로 했다.
우리는 자꾸만 감정을 증명하려 한다.
"내가 널 이만큼 생각해"라는 헌신마저 과시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사랑을 논리로,
그리움을 명분으로,
상처를 정당화로 포장하려 한다.
하지만 감정이란
언제나 말보다 느리게,
설명보다 낮게 흐르는 법일 테지.
생각해 보면
우는 일보다
울지 못했던 날이 더 많다.
화난다기보다
그저 말문이 막혔던 날도 있다.
누군가는 떠나기 전에도 멀어져 있었고,
누군가는 안녕을 말하고도 한참을 머물러 있더군.
그래,
어떤 감정은 끝나도 남고,
어떤 감정은 남아도 끝난다는 말이야.
철학이,
그리고 학문이,
내면 속 깊은 곳에 들어가다가
언젠가 '나 자신'을 마주하고,
조금 더 용기 내어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면 진리를 마주하듯.
감정이란 얕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정말 깊은 감정은 언제나 바닥까지 가라앉는다.
그리고 깊은 바닥에 내려앉아보니,
사랑, 기쁨, 희망, 존경, 연민, 설렘, 슬픔, 후회, 분노, 우울이라는 모든 감정이 머물러 있는
예쁜 생태계 하나가 구성된 바다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바다는 진리라지.
아,
그 진리는 매우 넓고 깊다지.
그렇네,
침묵은 잊음이 아니라
기억의 다른 이름이었고,
눈의 머무름은 그저 관심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노력이었고,
반응은 유/무로만 나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지켜보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해했든,
이해하는 과정이든,
혹은 이해하지 못했든,
모든 과정 속에서 곁에 있는 것도
충분히 사랑이 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감정이란
증명이 아니라,
머무름이겠네.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감정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사랑이 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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