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말을 남기려 하지 않을 때, 사랑은 고요히 승부를 끝낸다.
내가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영화,
<Now is Good>.
다코타 패닝, 제레미 어바인 주연.
삶의 끝자락에서
처음으로 삶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한 소녀의 이야기.
그녀가 세상에 건네는 질문들은 어쩌면
지금 나의 것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해.
<Ailee(에일리) _ Evening sky(저녁 하늘) (Movie 'Now Is Good') MV>
Now is good,
원작은 제니 다우넘의 소설 『내가 죽기 전에』.
삶이란 결국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말,
그 모든 순간은 끝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작품의 테마.
작 중 테사(다코타 패닝)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인생을 온전히 살아보기도 전에
그녀는 시한부라는 단어를 선고받는다.
그래서 그녀는 '경험하지 못한 것들(첫 키스, 관계, 도둑질, 나쁜 약, 유명해지기 등)'로 가득한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그 모든 욕망은 단 하나의 말로 수렴되었을 거야.
"살고 싶다.".. 음.. 아마 그랬을 것 같아.
그리고 그런 테사 앞에,
아담(제레미 어바인)이라는 아이가 다가온다.
테사는 죽음 앞에서도 성장한다.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삶을 품어낸다.
테사는 점점 죽음의 공포 앞에 의연해지고,
아담에게 치유받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으로 대학 입학을 미루고 고민하는 그에게(대학을 간다는 것은 테사의 옆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책감마저 포함된다) "삶은 계속된다"라고 격려하며 서로 큰 의지가 되어준다.
테사: 물수제비 잘하네, 새 위시리스트에 적어둬야지.
아담: 리스트에 또 뭐 있는데?
테사: 너무 많아. 봄, 수선화랑 튤립, 긴 기차여행, 공작새, 침대에서 아침 먹기, 공동 계좌 만들기, 너 코 고는 소리 평생 듣기, 학부모 참관 수업 갔는데 우리 아이가 천재인 거, 너랑 있기, 너랑 있기, 너랑 있기, 그냥 너랑 있기.
아담: 진짜로 원하는 거 뭐야?
테사: 어둠 속에서도 너랑 있는 거, 날 안아주고, 날 사랑해 주고, 내가 무서울 때 달래주고, 끝이 왔을 때 내 곁에 있어줘.
아담: 내가 잘못하면 어쩌지?
테사: 잘못하는 건 불가능해.
실수할까 봐,
상처 줄까 봐,
충분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아담의 마음을 감싸안는 순간.
테사는 느끼고 있었겠지.
사랑이란,
잘하려는 마음 자체로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걸.
잘하려는 그 마음이 있는 이상, 잘 못하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던 걸.
불교에서는 그런 말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속으로 조용히 처신하되, 겉으로는 어리석게 행동한다.
Paṇḍito santo upaparikkhati, bālo viya viharati.
이는,
자신을 현명하지 못한 자라 여기면, 이미 현명하고,
자신을 지혜로운 자라 여기면, 외려 어리석은 자이니 조심하라는 불교의 말이다.
사유의 질문 하나 남겨보지.
테사가 아담에게 "날 사랑해 줘, 끝이 왔을 때 내 곁에 있어줘."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단지 '함께 있어 달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 나 대신 말해줘"였을까?
테사는 왜 끝내 희열을 마주했을까?
그녀에게 아담은 왜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두려움의 반대에 머문 아이가 되었을까?
왜 끝내, 신(神)처럼 그를 섬기듯 끌어안았을까?
우리 인간은,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실패하고, 시도하고, 눈물 흘리고, 아파하고,
그러다 드디어 누군가를 품고 싶다는 감정에 도달했을 때.
그때 사람은 비로소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 속 공리(公理)에서 해방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랑은,
잘하고 못하고의 세계가 아니라
있고 없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잘 못하는 건 불가능해".
그 말은,
테사의 사랑이 가장 높은 밀도로 수렴된 문장이었지 않을지.
아담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명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을.
죽어가던 자가 살아 있는 자를 안았을 때,
살아 있는 자는 남을 이유가 되었고,
죽어가던 자는 남기고 갈 사랑이 되었다는 것을.
그렇다.
잘 못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유명 코미디언 박명수의 어록 중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150kg가 되어서야 다이어트를 꿈꾸고,
어떤 이는 인생의 쓴 맛을 봐서야 공부를 다짐하고,
어떤 이는 쓰라린 아픔을 겪어서야 돈을 소중히 여기고,
또 어떤 이는 사랑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사랑을 꿈꾼다.
이렇듯,
저마다 판단의 순간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순간 아래에서 시기만 다른 판단을 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판단의 시기(時機)가 늦을수록,
남을 시기(猜忌)하는 때의 타이밍만 앞당길 수도 있겠지만
판단의 시기가 빠르건, 늦건,
우리는 '행하노라' 다짐한 사람이 걷는 모습을 보고 '존중'과 '존경'을 건네지 연민과 비난을 건네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외면은,
하지 않고자 하는 이에게 향하기 마련.
30살에 공부를 시작했든,
40살에 투자를 배우려 마음먹었든,
150kg에 운동을 하려고 운동장을 나섰든,
또 당신이 큰 이별을 겪고 혓바닥을 다듬으려 노력했든,
잘하려고,
사랑하려고,
진정 품어내 겪으려고,
그리하여 함께 걸어내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은 아마, 타인의 신뢰를 부르는 순간일 것이다.
그때,
시작일 뿐이다.
기다리는 자란 믿음을 가진 자.
한참을 망설이다가,
비로소 한 발을 내딛는 사람.
그게 30년 인생 속 내 키워드였다.
마음먹지는 않았지만, 천성(天性)이 그랬나 보지.
누군가는 말하겠지,
왜 이제야 시작하느냐고.
왜 이제야 증명하려 하느냐고.
늦음은 선택이 아니라 통과다.
늦음은 느림이 아니라 기회다.
그리고, 늦음은 못함이 아니라 신뢰였다.
나는 나아가고자 한다.
기꺼이 잘하려는 사람으로,
조금은 서툴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사람으로.
언젠간 거울을 보며 내 얼굴을 향해 말하고 싶다.
사실 쏘아대고 싶기도 하다.
"보이지 않아도, 나 여기까지 왔다."라고.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일지도 모른다.
수억의 자금이
수십억의 밑천이 되듯
수천 가지의 질문은
수만 가지의 대답을 불러온다.
물리학에서 추상적인 개념이란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일반화하고 체계화한 것을 말한다.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고,
언어나 수학적 기호로만 표현되지.
수억의 자금이
수십억의 밑천이 되려면
수천 가지의 질문이
수만 가지의 대답을 불러오려면..
즉,
입력값(input)이 정해졌을 때,
그것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려면
지수함수(Exponential Function)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루 1분 공부가 적어 보이지만 1년 내내 매일 1%씩 성장하면 (1.01)^365 ≈ 37.78배로 성장하게 되듯이.
이게 바로,
f(x) = aˣ의 마법인거지.
하나의 감정이 두려움을 뚫고 나오면,
둘은 마음을 열게 되고,
셋은 손을 잡게 될 지어니,
넷이 되어 약속이 되고,
비로소 다섯으로 향하여 운명이 되는 것처럼
그러니 시작해도 된다는 말이다.
시작만 했다면,
잘못하는 건 불가능해.
알겠지?
그러니까,
스스로를 믿어보라는 말이야.
무대가 크지 않아도,
박수를 듣지 않아도,
이미 빛은 어딘가에 있어.
내가 걸은 이 걸음이,
누군가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기를.
그 누군가는,
사실 가장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준,
'나'일지도 모르니까.
"너랑 있기, 너랑 있기, 너랑 있기, 그냥 너랑 있기."
테사가 반복한 말처럼,
반복은 감정의 결심이니
잘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세 번쯤만 되뇌면,
그건 다짐이 되고,
다짐은 약속이 되더라지.
반복은 마음을 닦는 일이요,
다짐은 혀끝에서 기도로 번져,
아,
맹세하고 서약한 서원(誓願)이었더이다.
그 서원은,
사랑보다 오래된 말이었고,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었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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